좋은 말보다, 필요한 말

by Woodfire

좋은 말보다, 필요한 말



가까운 친구나 가족 사이에서는 따뜻한 말 한마디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많다.
그저 “그랬구나”, “고생했겠다”는 말만으로도 마음이 풀리고는 한다.


하지만 진료실에서는 조금 다르다. 그곳에서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정말 필요한 말을 꺼내야 할 때가 있다.


환자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고, 마음에 공감하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한 순간들이 있다.
때로는 공감을 넘어서 반복되는 삶의 문제를 풀어갈 방향, 그 첫 실마리를 함께 찾아야 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내가 건네야 할 말이 꼭 듣기 좋은 말은 아닐 수도 있다.
가끔은, 한마디로 조용히 흐르던 공기의 온도를 잠깐 바꿔야 할 때도 있다.


한 환자분은 오랜 시간 함께 상담해온 분이었다.
점차 안정을 찾아가며 밝은 표정이 늘어났고, 어느 순간부터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선생님은 제가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에요.”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선생님밖에 없어요.”


처음에는 나도 그 말이 참 고마웠다.
‘그래, 조금은 도움이 되고 있구나.’하며 내 마음도 함께 따뜻해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분의 감정 표현은 점점 더 깊고 강해졌다.
내가 잠깐 눈을 피하면 속상해 하시며, 그것을 자신이 거절당한 것처럼 느끼기도 하셨다
진료 시간이 끝난 뒤에도 계속 마음이 남는다고 하셨다.
그리고 마침내 이렇게 말씀하셨다.
“힘들 때면 선생님이 자꾸 생각나요. 선생님이 아니면, 이제는 상담을 받을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때 나는 알았다. 이건 치료적 신뢰가 아니라, 정신과에서는 전이라 부르는 것이 시작되었음을. 그리고 이 감정을 함께 다뤄야 할 타이밍이 왔음을.
(전이란, 과거에 중요한 사람 —부모나 애인, 혹은 상처를 줬던 누군가—에게 느꼈던 감정이 상담 장면에서 치료자에게 옮겨지는 심리적 현상을 이야기 합니다. 마치 마음속 깊은 기억이 지금 이 순간을 덮어씌우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상처받기 쉬운 시기에, 가장 의지하고 있는 사람에게서 “이 감정은 치료의 일부예요”라는 말을 듣는다는 것.
듣는 사람도, 말하는 사람도… 마음이 어렵다.


그래도 나는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다.
“지금 느끼시는 이 특별한 감정은, 우리가 함께 쌓아온 신뢰에서 비롯된 거예요.
하지만 이 감정이 곧 저라는 사람 자체를 향한 마음은 아닐 수 있어요.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을 함께 들여다보고 이해하는 것, 그 자체가 지금 치료에서 중요한 부분이예요.”


그 순간, 대화는 아주 잠시 멈췄다. 처음에는 환자분께서는 치료자가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자신이 의지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라며 몹시 상처를 받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날 이후, 오히려 상담은 한층 더 깊어졌다. 치료자와의 관계를 좀 더 현실로 데려오는 일. 서로에게 달콤하진 않았지만, 꼭 필요한 순간이었다.


이처럼 상담 장면에서는, 따뜻한 말보다 필요한 말을 해야 할 순간들이 자주 찾아온다.
그런 말을 건넬 때면 내 마음도 편하지만은 않다. 그래도 결국 나는 환자분이 듣기 좋은 말보다 필요한 말을 선택한다. 그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 믿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언젠가 정신과 의사가 조금 불편한 말을 건넸다면, 너무 서운해하지 않으셨으면 한다. 우리도 사실… 따뜻한 말부터 꺼내고 싶은 마음이 있다.
다만 그 순간엔, 오히려 진심으로 환자분을 위하기에 마음속에서 필요한 말이 먼저 손을 번쩍 들었을 뿐이다.


그러니 혹시라도 그런 말을 들으셨다면,
그 마음… 살짝 귀엽게 이해해주신다면, 정신과 의사에게는 힘이 많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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