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문득 중·고등학교 생활기록부를 확인해보고 싶어졌다.
어떤 내용들이 적혀 있는지 거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시절의 내가 어떻게 기록이 되어있을지 궁금했다. 마침 요즘은 인터넷으로도 생기부를 쉽게 발급받을 수 있어서, 손쉽게 신청을 해서 열람해 봤다.
생각보다 간단한 인증 절차를 거치고 나니, 금세 생기부 PDF가 내 손에 들어왔다.
파일을 열어 넘기던 중 눈에 띄는 항목이 있었다.
장래희망: 정신과 의사
나는 기억하지 못했는데, 중학교 3학년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줄곧 그렇게 적혀 있었다.
내가 장래희망으로 정신과 의사라고 했던 적이 있었던가?
중학교 1,2학년 때 고고학자를 꿈꾸며 장래희망 칸에 성실히 적었던 기억은 난다.
당시엔 다큐멘터리에 푹 빠져 있었고, 고대 유물이나 유적을 발굴하거나 연구하는 모습이 신기하고 멋지게 느껴졌다. 실제로 고고학자가 되고 싶다고 친구들에게 말하고 다니기도 했다.
그런데 정신과 의사라니.
이건 나조차도 몰랐다.
나는 학창시절 내내 좀 덤벙대고 소심한 편이었고, 주의가 산만해 놀림을 받기도 했다.
꼼꼼함과는 거리가 멀었고, 공부를 썩 잘하진 못했다. 그런 내가 정신과라는 진로를 구체적으로 떠올렸다는 사실이 지금도 조금은 낯설게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인턴이었던 꼬꼬마 시절에 진료과(전공)를 선택하기까지 꽤 오래 고민했다.
당시에 나는 소아과와 정신건강의학과 사이에서 망설였었다. 항상 아기가 너무 이뻐 보였고, 내가 존경했던 선생님들이 소아과 의사인 분들이 많았다. 그런데 정신과라는 전공도 뭔가 예술적인 부분을 많이 포함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매력적으로 보였다. (실제로는 아니라는 걸 뒤늦게 알았지만…) 결국엔 둘 다 놓치고 싶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서 정신과를 먼저 전공하고, 이후에 소아 정신과라는 세 부전공을 통해 아이들을 돌보자며 나름 머리를 굴렸다. 이때 처음으로 내가 전공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고 생각했는데, 생기부를 보니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이 길을 향한 마음이 있었구나 싶었다.
그걸 알게 되니 괜히 마음이 묘해졌다.
어쩌면 그 시절의 나는 미래의 나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의외로 똑똑했던 유년시절의 나?)
그리고 지금 이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잠시나마 스스로에게 “잘 왔다”고 말해주고 싶고 뭔가 뿌듯했다.
그렇게 파일을 닫으려는 순간, 한 줄 더 눈에 들어왔다.
“정리정돈이 필요함” / “주의가 산만함”
이건 뭐, 지금도 달라진 게 없다.
물건을 어디에 뒀는지 자주 까먹고,
책상은 며칠 만에 다시 어질러지고,
일정은 늘 계획보다 앞서거나 늦는다.
성인이 되어 ADHD 진단을 받고 나서야 그간 이해되지 않던 퍼즐 조각들이 맞춰졌지만,
어쩌면 생기부는 이미 오래전부터 내 문제의 실마리를 알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다시 돌아보니, 나는 꽤 일관된 사람이었구나 싶다.
어릴 때도, 지금도
조금 산만하고, 조금 덤벙대지만
사람의 마음을 궁금해하고,
그걸 오래 들여다보는 걸 좋아했던 아이였던 것 같다.
그때의 나는 그걸 ‘정신과 의사’라는 말로 적어두었고,
지금의 나는 그걸 직업으로 삼아 살아가고 있다.
부족한게 많았던 유년 시절이지만, 장래희망을 적을 때만큼은 나름 솔직하고 진심이었나 보다.
커서 그 길을 나도 모르게 선택한 것을 보면 말이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분들도, 시간 되신다면 한 번쯤 예전 생기부를 들춰보시길 권해본다.
기억나지 않던 생기부 속 한 줄의 문장이, 생각보다 오래전부터 지금의 당신을 말해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