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에서 일을 시작하고 난 후 나는 한국에서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나 자신을 변화시켜야 했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혼자만의 '집순이 탈피하기'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집순이 탈피하기 프로젝트 그 첫 번째는 하프 근무를 하는 날 이뤄졌다. 보통은 오픈부터 마감까지 일을 하기 때문에 하프 근무를 하는 날은 나에게 기회였다. 당시 밴쿠버의 날씨는 미국 산불의 영향으로 당장 집에 가도 될 만큼 좋지 못했지만 나는 잉글리시 베이로 향했다. 게다가 겨울이 되면 겨울 내내 비가 오는 밴쿠버였기 때문에 겨울이 오기 전 조금이라도 더 많은 밴쿠버를 봐야 한다는 마음에 조급했던 것도 같다.
잉글리시 베이는 원래 노란색이던가요?
특별히 잉글리시 베이를 택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주변에서 좋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기도 하고 무엇보다 찾아가기가 가장 쉬워서 선택했다. 하지만 마음이 조급했던 탓에 날씨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그날 밴쿠버의 날씨는 미국 산불의 영향을 받아 온 세상이 뿌옇고 쾌쾌했으며 조금만 밖에 있어도 눈이 따갑고 침침해졌으며 목이 칼칼해져서 기침이 절로 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나는 일이 아닌 무엇이라도 해야만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있었다. 그래서 퇴근 후 집으로 가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밴쿠버 다운타운으로 향하는 버스에 탑승했다. 버스를 타고 노스밴쿠버를 한 바퀴 돌고 난 후에야 스탠리 파크에 도착했다. 어쩌면 다운타운은 노스밴쿠버보다 날씨가 더 맑지 않을까 했던 것이 무색하게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잉글리시 베이 입구에 있는 조각상
스탠리 파크에서부터 자전거 대여점을 지나 긴 길을 쭉 따라 걷다 보면 위 사진 속 조각상을 만날 수 있다. 이걸 잉글리시 베이의 상징적인 조각상이라고 해야 하나.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몇몇 사람들을 따라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사실 이 조각상을 처음 봤을 때 나는 너무도 잉글리시 베이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비치라고 하면 바다와 관련된 무언가가 있는 편이 훨씬 낫지 않나?'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다 문득 이 조각상이 가진 의미는 무엇일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 조각상을 두고 누군가는 중국 부자라고 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중국의 연예인이라고 하기도 했다. 그래서 직접 찾아보았다.
<A-maze-ing Laughter>이라는 작품명을 가진 이 조각상은 중국인 아티스트 <Yue Minjun>의 조각품으로 2009년-2011년 밴쿠버 비엔날레 전시회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게다가 우스꽝스럽게 웃고 있는 조각상이 가진 의미는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매우 심오했다. 알고 보니 이 조각상들은 어떤 상황이더라도 웃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풍자하는 작품이었다.
이유를 알고 다시 보니 그저 흉물(?)처럼 보이던 웃고 있는 조각상이 어쩐지 슬퍼 보였다. 입은 여전히 웃고 있지만 전체적인 표정을 볼 때 이 조각상이 정말 행복해서 웃는 것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역시 예술은 위대하다.
잉글리시 베이가 노랗게 노랗게 물 들었네
조각상을 지나 해변가로 걸어가 진짜 잉글리시 베이를 눈에 담았다. 그곳에 맑고 쨍한 잉글리시 베이는 없었다. 마치 카메라에 노란색 필터를 끼워놓고 사진을 찍은 것처럼 청량한 파란색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나다 밴쿠버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오손도손 모여 수다를 떠는 사람들, 네트를 쳐놓고 공놀이를 하는 사람들, 나란히 걸음을 맞춰 산책로를 걷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생각했던 모습과 다르다는 실망감에 풀이 죽어 넋을 놓은 나와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저들은 정녕 이런 날씨마저 즐길 수 있는 긍정 대왕들이란 말인가.
다시 만난 잉글리시 베이
'노란 잉글리시 베이' 이후에도 나는 새로운 삶 구축하기에 바빴다. 쉬는 날에도 집에만 있지 않기 위해 어디든 나가서 돌아다녔고 없는 일도 만들어서 했다. 그러던 중 다시 해가 쨍하게 뜬 어느 맑은 날 나는 다시 잉글리시 베이를 찾았다.
마침내 잉글리시 베이
드디어 사람들이 말하는 '그 잉글리시 베이'를 볼 수 있었다. 그때는 음악을 들을 생각도 못하고 마냥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생각보다 햇빛이 따가워서 선글라스가 없는 것이 불편했지만 그럼에도 바다를 옆에 끼고 걷는다는 것은 나에게 굉장한 힐링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보니 다리가 아파 근처에 보이는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과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여유가 바로 이곳에 있었구나. 어쩌면 한국에서도 나 스스로가 새로운 사람이 되고자 마음을 먹고 노력을 했다면 이렇게 멀리까지 도망치지 않았어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맙소사 나라는 인간은 어떻게 생각이라는 걸 좀 하려고 하면 금세 우울의 늪으로 빠져버리는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생각은 그만하고 나에게 주어진 여유를 마음껏 누리기로 했다.
내 마음을 사로잡은 Kitsilano beach
잉글리시 베이 다음은 킷칠라노 비치였다. 잉글리시 베이보다는 가기가 까다로워 계속 미루고 미루다 장을 보고 시간이 남아 킷칠라노 비치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킷칠라노 비치의 첫인상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마주한 킷칠라노 비치는 단번에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아마도 이곳이 내가 밴쿠버에서 가장 사랑하는 곳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잉글리시 베이에서 보았던 사람들의 여유는 킷칠라노 비치에서도 볼 수 있었다. 나만 이곳에서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은 마음에 휴대폰을 꺼내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 그리고 친구들과 이 아름다운 풍경을 함께 공유하고 싶었다.
킷칠라노의 산책로를 걸으며 찍은 사진들
킷칠라노 비치는 잉글리시 베이보다 훨씬 더 차가운 색깔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면 볼수록 잉글리시 베이보다 더 파란빛이 강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이번에도 나는 잉글리시 베이에서 그랬던 것처럼 혼자서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킷칠라노 비치의 산책로를 걸을 때는 잉글리시 베이에서 그랬던 것보다 더한 외로움을 느꼈다. 손을 잡고 걸으면서 서로를 바라보는 눈에 꿀이 뚝뚝 떨어지는 연인들을 보다 무심코 나의 마지막 연애가 언제였는지 생각해보았다. 너무 까마득하잖아. 이렇게 좋은 곳에서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였다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엄마가 여기에 있었다면 정말 좋아했을 텐데. 사진 찍기 좋아하는 친구를 멋진 배경 앞에 세워두고 몇 장이고 사진을 찍어 인생샷을 안겨줬다면 정말 좋아했을 텐데. 그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질 때 즈음 나는 집순이 탈피하기 프로젝트는 어느 정도 성공했을지 몰라도 우울하고 외로움을 잘 타는 나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래서는 새로운 삶도 새로운 나도 찾을 수 없겠다 싶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음 프로젝트를 계획했다. 이름하여 <밴쿠버에서 새로운 친구 사귀기> 프로젝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