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이야기, come back to Korea
모든 이별은 슬프다.
캐나다 밴쿠버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하던 중 남자 친구가 생겼고 워킹홀리데이 비자가 끝나고 비자 연장하지 않으면서 팔자에도 없는 장거리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다.
우리는 울지 말자,
웃으면서 헤어지고
웃으면서 다시 만나자.
나는 원래 그래도 안 그런 척, 센척하는 것이 습관인 사람인지라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를 기약 없는 이별을 하면서도 괜히 담담한 척했다. 처음 나의 그런 반응 때문에 섭섭해했던 남자 친구도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현실을 받아들이고 함께 평온을 찾아갔는데 나중에는 담담한 척을 하는 나에게 정말로 담담한 반응을 보이는 남자 친구에게 나도 모르게 서운함을 느꼈다. 나는 담담한 게 아니라 담담한 척인데 남자 친구는 정말로 담담한 것 같아서 그랬던 것 같다. 나라는 사람은 참 모순이 한가득이다.
그래서 서운한 티도 내지 못했다. 내가 먼저 담담한 척을 하며 다 괜찮은 듯 굴었으니 이제 와서 어떻게 그러냐고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러다 정말 남자 친구가 나 없이도 잘 지내고 다시는 나를 찾지 않으면 어쩌나 마음이 조급해져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 다가올수록 나는 우리의 이별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꺼냈는데 어쩌면 나처럼 우리의 이별을 굉장히 섭섭해하는 남자 친구의 반응을 보고 싶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이 양반 끝까지 담담했다.
그렇게 이별의 날이 다가왔다. 한국으로 돌아갈 짐을 싸는데도 남자 친구는 본인이 없어야 내가 더 편하게 짐을 쌀 수 있을 것 같다며 주말인데도 불구하고 일을 하러 출근을 했고 나는 그것마저도 서운해서 혼쭐이 났다. 캐리어에 다시 내 짐을 채워 넣으며 몇 번을 울었다가 그쳤는지 모른다. 하지만 남자 친구가 다시 돌아왔을 때는 언제나 그랬듯이 또 담담한 척 연기를 했기 때문에 그는 내가 이별을 준비하면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아마 모를 것이다.
밴쿠버 국제공항으로 가는 길, 우리는 변함없이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공항에 도착하고 나서는 남자 친구는 주차를 하기 위해 나를 먼저 공항에 내려주고 주차를 하고 왔다. 나 혼자서 안 되는 영어로 어영부영 수하물을 보내고 비행기 티켓을 발권받아 주차를 하고 온 남자 친구와 함께 한산한 공항 어느 곳에 앉아 잠깐 얘기를 나눴다. 우리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글쎄, 확실한 날짜를 말해줄 순 없지만 곧 만날 거야. 그런 식의 대화를 몇 번 주고받으니 어느덧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다. 나는 조금 더 함께 있고 싶었지만 약 20분 정도 함께 있다가 안의 상황이 어떻게 되는지 모르니 혹시 늦어져서 비행기를 놓치게 될 일을 염려한 남자 친구가 먼저 이별을 얘기했다.
결국은 또 눈물이 터졌다. 웃으며 헤어지자고 해놓고서는 나는 내 입으로 뱉은 말도 지킬 줄 모르는 아직 미성숙한 인간이었다. 눈물이 삐질 삐질 나는데 울지 않는 척 남자 친구를 끌어안고 울었다. 눈물이 나는 게 어쩌면 당연했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정말 몰랐기 때문에 어쩌면 지금이 남자 친구와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굉장히 서글펐다. 하지만 남자 친구는 이번에도 담담했다. 본인이 울면 어쩌냐고 우스갯소리를 해놓고는 정작 우는 건 나였고 남자 친구는 울지도 않았다. 그저 우는 나를 다독이면서 '울지 마, 우리 곧 다시 만날 거잖아.' 했다. 그러니까 그 '곧'이 언제냐고 되묻고 싶은 걸 그냥 입을 다문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우리 곧 다시 만날 거니까.'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탑승구까지 들어가는 그 길에서도 나는 몇 번을 고갤 돌려 남자 친구를 쳐다봤다. 근데 남자 친구는 이미 나에게서 시선을 떼고 돌아가고 있었다. 그 모습마저도 어찌나 서운했는지 나만 우리의 이별이 힘든가 싶었다. 마음이 심란하니 면세점을 구경하고 할 정신도 없었다. 눈물을 참는데만 온 신경이 집중돼서 그냥 정신이 멍했다.
나는 그 잠시도 참지 못하고 탑승을 기다리면서 남자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던 중 페이스톡 알림이 떠서 보니 나의 구룸메, 우리 막냉이 지아였다. 지아는 나에게 조심히 가라며 금방 다시 보자고 마지막 인사를 하러 연락한 것이었다. 귀엽게 조잘조잘 얘기를 하는 그녀를 보고 있으니 우울했던 기분은 금방 나아지고 다시 웃음이 났다. 그러다가도 울컥하기를 몇 번, 전화를 끊기 직전에는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서 또 눈물을 참느라 애를 썼다. '언제가 될 진 몰라도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 괜히 씩씩한 척 마지막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은 후 다시 혼자 눈물을 훔치며 탑승을 기다렸다.
나는 항상 센 척을 하는 사람이지만 사실은 눈물도 많고 약한 인간이라서 문제다. 그래서 다시 스스로 위로하기 시작했다. 그래, 진짜 마지막이 아니니까, 언제일지는 몰라도 다시 돌아올 거니까, 이건 끝이 아니니까….
뜬눈으로 11시간 40분
캐나다 밴쿠버에서 한국 인천으로 가는 11시간 40분 동안 단 1분도 잠이 들지 못했다. 다리도 아프고 엉덩이도 아프고 이것저것 불편한 것 투성이었지만 가장 불편했던 것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마음이었다. 비행기에서도 눈물을 참느라 어찌나 고군분투했는지 모른다. 노트북을 열어 남자 친구에게 직접 하지 못했던 말들을 줄줄줄 써 내려가며 속에 응어리진 것들을 풀어내기도 하고 지난 1년 동안의 워킹홀리데이 생활을 되짚어보며 그래도 그때가 좋았지 하는 후회를 또 시작했다.
그토록 돌아가고 싶었던 내 조국으로 돌아가는 길이 마냥 신나지가 않아서 기분이 좋지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한국으로 돌아가면 해야 할 것들, 먹고 싶은 것들 등을 생각하며 신이 난다는데 나는 해야 할 것들은 몰라도 먹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다 부질없다는 생각만 했다. 캐나다 밴쿠버에 두고 온 추억들이 또 나를 온전히 현재를 즐길 수 없게 만들었다.
그래도 첫 번째 기내식을 먹을 땐 그나마 기분이 좋았다. 그 유명한 대한항공의 비빔밥을 드디어 먹어본다는 생각에 잠시 들떴다. 사람이 참 간사하다. 비빔밥은 기대했던 것만큼 특별하고 대단한 비빔밥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맛있었다. 고추장 소스가 내가 원했던 만큼 맵지 않아서 조금 싱거운 비빔밥이었지만 나름 그만의 매력이 있었다. 밥을 먹고 나서는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당시 옆자리가 비어있어서 편히 다리를 뻗고 비행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뭐가 그렇게 귀찮았는지 옆자리에 짐을 잔뜩 쌓아두고 나는 정자세로 앉은 채 11시간 40분 비행을 했다.
두 번째 기내식은 도착하기 약 2시간 전에 먹게 되었다. 단순히 뒷사람이 닭고기를 주문하는 걸 듣고서는 그럼 나는 소고기를 먹어야지 해서 소고기를 선택했는데 나도 그냥 닭고기를 먹을 걸 그랬다. 맛은 나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또 좋다고 하기도 좀 애매했다. 그냥 그저 그랬다.
마침내 한국
코로나로 인해 이것저것 서류 검토할 것이 많아 대기 시간이 길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나는 앞자리에 앉아 있었기도 하고 생각보다 모든 일처리가 일사천리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줄을 서도 5분을 넘기지 않았고 서류를 검토받는 시간도 5분을 채 넘기지 않았다. 하여 마중 나오기로 한 동생에게 넉넉하게 1~2시간 후에 오라고 했는데 짐도 빨리 찾는 바람에 오히려 내가 동생을 1시간 30분이나 기다려야 했다.
기다리는 시간은 남자 친구와 보이스톡을 하며 보냈다. 내가 없는 밴쿠버가 어색하다며 이제야 조금씩 실감이 난다는 남자 친구와 그제야 서운한 마음이 누그러진 나였다. 그때도 눈물이 나서 아주 혼쭐이 났다. 눈물이 왜 그렇게 많은지 사람들 몰래 눈물 닦느라 힘들었다.
나는 격리 면제를 받고 오긴 했지만 그래도 도착한 시간 기준 24시간 이내에 거주지 관할 보건소에 가서 코로나 검사를 받고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약 하루정도 집에서 격리를 해야 했기 때문에 어디에도 들리지 않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동생은 경기도에 살고 있었는데 동생 또한 나를 마중하기 위해 약 2~3시간을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오느라 고생을 했기 때문에 고맙다는 말과 함께 조금의 용돈을 줬다.
결국 집에는 도착한 다음날 새벽 3시가 되어서야 도착했다. 새벽 3시에 1년 만에 엄마가 차려주는 엄마표 집밥을 먹고 빈둥거리다가 아침 일찍 보건소에 들러 코로나 검사를 받기 위해 잠이 들었다.
다시 한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