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바람과 함께
H와 연습을 함께한 시간이 즐겁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잠시 즐거웠던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동시에 불편한 감정과 경계심이 함께했다. 손을 불에 데인 적이 있는 이는 따뜻한 차를 한 모금 하면서도 불안해할 수 밖에 없다.
축제날이 다가오고, 날씨는 조금씩 쌀쌀해졌다. 쿨링 소재의 반팔은 면 소재의 긴팔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시원한 공기가 마음을 조금은 울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결심했다. H와 멀어지기로. 지나간 시간을 통째로 도려내기로.
시범단 공연은 사고 없이 잘 마무리되었다. 시범단 내내 잔부상을 견뎌야 했고, 당일날 미흡한 매트 설치로 인해 몸통이 욱신거렸지만 그런 건 사소한 문제일 뿐이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당일 축제 서빙을 맡고 부스 철거를 돕고 있었다. 지금은 이유도 기억나지 않는 사소한 사건으로 H와 또다시 크게 다투었고, 가을 축제의 밤은 시끄러운 공연 소리와 너저분한 술자리의 쓰레기들로 끝이 났다.
나의 생일이 다가왔다. 대학에서 보내는 나의 첫 생일이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 생일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나는 술집에서 케이크를 사두고 기다리는 동기들을 뒤로 하고 유도장으로 향했다. 그때의 나에게 남은 마지막 의미는 유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