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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 속에서 산책하기

2025/01/02

by Stellar

네시가 넘어서야 잠이 들었지만 오전 중에 눈을 떴으니 이만하면 됐다고 자찬하며 일어났다. 열 시 반부터 울리는 알람을 스누즈 하며 어떻게든 일어나 보겠다고 애쓴 성과니까. 어제와 달리 맑은 하늘에 해가 보였지만 겨울엔 이런 날일수록 온도가 내려간다. 잠들기 전에 다짐한 아침산책을 갈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상상 속에서는 따뜻한 옷을 걸쳐 입고도 스며든 찬 공기에 몸을 부르르 떨며 하이드 파크를 거닐고 웨스트민스터를 구경하다 몸을 녹이러 내셔널 갤러리에 갈까 소호의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실까 하고 있었지만 그것도 오늘은 의미가 없게 느껴졌다. 몸을 숨기고 방치하며 살아온 삶의 구멍 속으로 자아가 빨려 들어가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 무력함을 잊는 데는 음식과 잠이 최고인데 잠을 줄였으니 음식을 섭취해야 한다. 런던 시내를 산책하는 상상을 중단했으니 그다음 할 것이 필요해서 잠시 책을 읽다가 라자냐를 만드는 상상을 하기 시작한다. 상상으로는 모든 것이 가능하고 빠르고 안 귀찮다.


한 달 전에 장 본 음식이 거의 바닥이라 이제 꾸역꾸역 요리를 해야 끼니를 때울 수 있다. 이사 가는 날이 4일 앞이니 더 이상 장을 봐오기도 뭐 하니 베이크드빈과 페스토와 기타 등등의 재료를 대강 섞어 라자냐를 그럴싸하게 만들어 냈다. 싹이 나기 시작한 감자와 곰팡이가 피기 시작한 콜리플라워도 오븐에 같이 구웠다. 미국 의학드라마를 보며 이걸 먹고 있는데 어플에 알림이 떴다. 예약대기를 걸어놨던 프란츠 퍼디난드의 티켓이 구입 가능하다고 한다. 그들의 대단한 팬은 아니지만 ‘Take me out’을 들을 때마다 몸을 흔들어 재끼고픈 욕망이 드는 것은 사실이고 새 앨범 투어의 첫 공연인 리버풀 공연의 티켓은 고작 16파운드다. 티켓을 결제한 뒤 그들의 최근 공연 영상을 찾아봤다. 비슷한 때에 함께 유행했던 Arctic Monkeys와 얼추 비슷한 연배라 생각했는데 머리가 희끗한 아저씨들이 나온다. 음악이 나쁜 것도, 퍼포먼스가 쳐지는 것도 아니지만 어딘가 애매한 느낌. 리버풀과 맨체스터에 가는 교통편을 알아보다가 이내 구입한 티켓을 환불요청 해버렸다. 그들이 아저씨가 되어서가 아니라 나에게는 더 좋은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최소한 경제적 자립은 유지하기 위해 꾸역꾸역 일을 해 왔지만 지난 십 년 간의 생활패턴을 지속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받아들여야 하는 때다. 돈을 버는데 쓴 시간을 사용하고 싶은 곳에 사용했으니 후회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서른일곱에 엄마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하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2월 말에는 캐나다에 비자를 받기 위해 다녀와야 할 텐데 가야 하는 것인지 가고 싶은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출구가 없는 미로 속에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건 좋은 일이다. 급박함에 쫓겨하는 선택을 가려내는 법을 배우는 중이기 때문이다. 상상 속에서 산책하던 장소들에도 곧 도달할 것이다. 그러니까 방 안에서 계속해 상상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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