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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셔널갤러리와 트라팔가광장

2025/02/15

by Stellar


딱 이쯤이었다. 10년 전 홀로 무전여행을 하던 내가 쭈뼛거리며 버스커들 사이에 자리를 펴고 엽서를 팔던 장소가. 말레이시아를 경유하는 비행기를 타고 겨우 런던에 도착해 시차 적응도 못한 채로 여행 첫날부터 패기 넘치게 밥값을 마련하겠다고 맨바닥에 앉아 팻말을 만들고 가져온 엽서와 사진들을 늘어놓았다.


“I want to travel more!”

라고 적은 팻말 뒤에 앉은 덩치 작은 아시아인에게 사람들은 관심을 많이 가졌고 한 장에 50펜스에 팔던 내 사진과 실크스크린으로 찍어간 엽서들을 쉽게 사주었다. 특히 한글이 적힌 엽서와 사진들은 금방 사라졌다.


한글이 적힌 엽서들을 보고 한국 사람이냐며 말을 걸어온 또래의 남학생들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내가 다닌 대학교의 옆 대학교의 학생들이라 서로 이곳에서 만난 것을 신기해하기도 했었다. 엽서를 사서 떠난 그들 중 한 명이 갑자기 비가 오기 시작하자 달려와 우산을 씌워주고 자리를 정리하는 것을 도와주기도 했다. 내 옆 자리의 예술가도 내 엽서가 더러워지지 않도록 비닐케이스를 나누어 주었었다. 처음 만난 사람이라도, 또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도 용기를 내고 마음을 열어두면 얼마든지 통할 수 있다는 믿음을 처음 얻었던 특별한 장소가 바로 이곳이었다.


10년의 시간이 흘러 트라팔가광장을 다시 걸으며 그때의 내가 얼마나 아름다운 여행을 했는지 새삼 깨닫는다. 수없이 만난 좋은 사람들로 하여금 숱한 위기에도 세상에 대한 믿음을 지켜낼 수 있었다. 지금의 내가 모르게 된 것들을 그때의 나는 알고 있었던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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