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1/08
아홉 시에 일어나 헬스장 첫 출근을 했다. 주민센터 아침수업 바이브의 발레핏 수업을 들었는데 생각보다 힘들고 운동을 두 달 쉰 사이 근육이 준 것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수업을 두 개나 예약했지만 이 수업이 끝나고 그대로 줄행랑쳤다. 집에 돌아와 여유 있게 커피를 마시고 샐러드와 샌드위치를 만들어 점심을 먹고 실크스크린 작업 준비를 하며 시간을 보낼 때까지는 평화로운 오후였다.
재택근무하는 날인 인아가 퇴근한 뒤 헬스장 구경과 내가 픽업하기로 한 물건을 가지러 가기 위해 밖에 나왔는데 비가 생각보다 많이 내렸다. 원래 눈소식이 있었을 만큼 쌀쌀한 날이라 자전거 타고 가다가 감기가 걸릴까 싶어 다시 집에 들어가 우비를 걸쳐 입고 나오던 순간 평화로운 하루는 끝나고 미스터리 어드벤처 스릴러가 시작되었다. 현관문을 닫고 나와서 인아가 ‘아!’하며 문손잡이 쪽으로 손을 뻗었고 그와 동시에 나는 손잡이를 위로 올려 문을 잠가버렸던 것이다. 인아는 열쇠를 안에 두고 온 것이 순간 생각나 ‘아!’했던 건데 그 소리에 나는 순간 ‘문 잠가야지!’했고 환상적인 쿵짝의 향연으로 우리는 집 밖에 갇혀 버렸다.
게시판에 붙은 매니저 번호로도, 집주인과의 메신저로도 연락이 닿질 않아 열쇠공에서 연락을 했더니 120파운드 정도 나온단다. 20만 원이 한순간에 사라질 위기를 맞닥뜨리고 나니 일단 뭐라도 해야지 싶어 이웃들의 초인종을 눌러보았으나 역시 응답이 없었다. 계단을 오르던 80호의 롤랜드가 경비인의 번호를 알려줬지만 그것마저 없는 번호였고 조금 더 저렴한 프랜차이즈 열쇠집에 전화해 체념한 채 사람을 부르려고 하는 순간에 집주인에게 연락이 왔다. 다행히도 77호의 마크에게 맡겨둔 스페어키가 있었고 우리는 무사히 집에 들어가 열쇠를 두 개 다 챙기고 나오며 그래도 한 시간 만에 일이 해결되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이미 정신이 저세상으로 떠난지라 헬스장 구경은 관두기로 하고 나눔 받기로 한 옷을 가지러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비는 오고 날은 추운 데다 인아는 런던에서의 첫 라이딩이었다. 초행길에 지도를 계속 확인하며 잘 가고 있었는데 길이 점점 좁고 어두워지더니 낡고 커다란 비석들만 어슴푸레 보이는 공동묘지가 나타났다. 돌아가는 길은 없는지 구글맵에 아무리 물어보아도 자전거 들어가지 말라고 여닫이 철문을 설치한 이 무시무시한 공동묘지를 가로지르는 것이 최단경로이자 유일한 경로라니. 지그재그로 철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들어가야 하는 입구는 커다란 우리 자전거를 대각선으로 구겨 넣고 바퀴 한쪽을 들어 올리면 간신히 통과가 가능했지만 시커먼 공원의 비석들과 그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질퍽한 산책로, 어둠 속에 유령처럼 서있는 정체 모를 사람들을 지나쳐 공원을 가로지르는 3분 여의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마치 자신에게 무슨 일이 닥쳐오는지도 모른 채 순진하게 바보짓을 하고 있는 컬트영화 캐릭터였다.
그렇게 간신히 목적지에 도착하고 받은 건 빨래도 안 한, 당장 쓰레기통에 넣어도 될 상태의 옷 한 벌이라는 것이 너무 우스웠지만 일단 빨리 집에 무사히 도착해서 몸을 녹이기 전에는 웃음을 터뜨릴 수도 없었다. 도저히 인아를 다시 그 길로 데려갈 수가 없어 불안한 마음으로 검색된 다른 길로 돌아가기로 했고 무사히 을씨년스러운 공동묘지를 둘러서 아침에 헬스장에 갔던 길을 지나 따뜻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인아는 자극적인 음식이 당긴다며 생라면을 안주삼아 아사히맥주를 마셨고 나는 어제 먹고 남은 카레로 저녁식사를 했다. 추위에 떨어서 근육이 더 뭉쳤는지 어깨가 뻐근하다. 고작 두 시간 동안 벌어진 황당하고 어이없는 해프닝인데 어쩌다 보니 맘씨 좋은 여러 이웃들의 얼굴과 이름을 알게 되었고 인아는 누군가와 함께 지내면 “서로 의지하는 만큼 죽을 확률도 높아진다.”라고 하루평을 남겼다. 나는 누군가과 함께 지내니 금세 사건이 생기고 서사가 생기고 주변이 확장되는 것에 새삼 놀랐다. 인아가 “열쇠 꼭 챙길 것!!”이라고 문에 붙일 경고문을 만들었다. 나는 정신머리 간수를 더 잘해야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