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사에서 르네 데카르트의 등장은 흥미로운 지적 혁명이었다. 그는 흔들리지 않는 진리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우리가 진리 혹은 진실이라 믿었던 모든 것을 의심하는 ‘방법적 회의’란 도구를 만들고, 직접 사용한다. 감각은 우리를 속일 수 있고, 수학적 진리조차 진리가 아닐 수 있다는 가정을 세운 그는 세계의 모든 존재 가능성을 괄호 안에 넣고 지워나간다. 난 17살이었을 때, 그 절대적 의심의 끝을 읽으며, 세상의 모든 시간이 멈춘 듯한 정적을 느꼈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 속에서 드디어 당시엔 결코 부정할 수 없었던 하나의 명징한 사실을 내뱉는다. 의심하고 있는 나, 즉 ‘생각하는 나’의 존재만큼은 의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이 명제는 당시 인간에게 전율에 가까운 희열을 안겨주었을 것이다(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는 외부의 권위나 신의 계시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인간 내면의 사유 활동만으로 존재의 확실성을 증명해 낸 데카르트 철학의 제1 원리이다. 이 책을 읽었을 때 난 배움이 얕았기 때문에 생각하는 자아가 세계를 인식하는 단단하고 고정된 실체로서 그 지위를 확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데카르트의 확신은 임마누엘 칸트에 이르러 정교하고 엄밀한 비판에 직면한다. 3대 비판서를 통해 인간 이성의 한계와 범위를 꼼꼼하게 규명하려 했던 칸트는, 데카르트가 느꼈던 그 ‘확신’의 지점에서 멈추지 않고 더 깊은 심층을 파고든다. 칸트는 ‘나는 생각한다’라는 의식이 인식이 이루어지기 위한 논리적 전제이자 최상위 조건임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는 ‘생각하는 기능이 있다’라는 사실이 곧 ‘생각하는 영혼이라는 비물질적 실재한다’는 것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생각하는 나’는 다양한 감각 정보를 종합하고 통일하는 ‘형식적 주어’ 일뿐이지, 그것이 곧 불변하는 영혼의 실재를 증명하는 존재론적 근거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칸트의 이러한 분석은 데카르트를 무너뜨리기 위함이 아니라, 사유의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인식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 섣불리 확신하지 않으려는 철학적 엄밀함과 품격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즉, 코기토는 존재의 증명이 아니라 인식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형식적 단서로 그 위치가 재조정된다.
현대에 이르러 자아에 대한 논의는 내가 유희용으로 만든 ‘분포 이론’이라는 새로운 관점을 통해 다시 한번 전복된다. 이 관점에서 볼 때, 데카르트가 확신했던 ‘생각’조차 온전히 ‘나’의 소유물이라 단정할 수 없다. 생각은 내 안에서 생성되어 내가 통제하는 고유한 생산물이 아니라, 외부의 자극과 내면의 상태가 상호작용하여 확률적으로 떠오르는 ‘분포(Distribution)’의 파편들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식은 사유를 생산하는 공장이 아니라, 흘러가는 분포들을 일시적으로 포착하는 ‘그릇’에 불과하다. 의식이라는 그릇에 특정 생각이 담기는 것은 나의 절대적 의지라기보다, 그 순간의 확률적 인상 강도가 빚어낸 결과이다. 따라서 불완전하고 유동적인 ‘생각’을 근거로 영혼의 실재나 고정된 자아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시도는 논리적 비약이자 위험한 증명이 된다. 그런 확신은 사유의 꼼꼼함을 마비시키는 독이며, 철학적 태도는 언제나 그랬듯 당연해 보이는 것을 끊임없이 곱씹고 되새기는 ‘조심성’ 그 자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뇌, 혹은 의식이란 가상의 공간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을까? 통념과 달리 뇌는 고정된 자아나 정보로 꽉 들어차 있는 견고한 저장소가 아니라 생각한다. 분포 이론의 시각에서 본 나의 뇌는 ‘텅 빈 그릇 위에 수많은 물줄기가 야멸차게 흐르고 있는 순간’ 그 자체이다. 여기서 ‘물줄기’란 끊임없이 쏟아지는 감각 정보, 기억의 파편, 그리고 무작위로 활성화되는 시냅스의 연결들이다. 이 물줄기들은 때로는 질서 정연하게 흐르며 논리를 형성하지만, 때로는 타자나 환경과 같은 외부 요인에 의해 난류를 일으키며 무작위로 흐트러진다. 이 과정에서 시냅스는 연결되기도 하고 끊어지기도 하며, 그 혼란 속에서 단일한 자아는 해체되어 의식의 구석으로 밀려나거나, 혹은 여러 개의 파편화된 자아가 동시에 존재하며 부유하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정체성의 혼란’이라 명명하는 현상은, 바로 외부의 영향으로 인해 의식의 물줄기가 무작위성(Entropy)으로 회귀할 때 발생하는 현상이 아닐까.
이러한 현상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온전한 자신을 인지하고 살아갈까? 여기서 하이데거가 주창한 ‘현존재’로서의 인식이 요청된다. 인간은 단순히 흘러가는 물줄기를 바라보는 관조자가 아니라, 그 흐름 속에서 ‘자신이 존재함’을 이해하고 시간의 역사를 구성해 나가는 존재다. 독서와 사유, 그리고 치열한 자기 성찰은 무작위로 흐르는 물줄기 속에 단단한 ‘기둥’을 박는 행위와 같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통시적 연결 고리를 놓치지 않고 그 기둥에 머무를 때, 비로소 인간은 흩어지는 분포를 하나의 ‘역사’로 엮어낼 수 있다. 즉, 자아는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자아는 생각의 분포와 감각의 인지 작용과 탐색, 다양한 관계 맺음 속에서 한 인간이 세워낸 질서이자 동시에 본질적 토대가 되어준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치열하게 부여잡고 있는 이 질서가 언제든 깨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아는 듯하다. 그 가장 강력한 증거가 바로 ‘거짓말’이다. 우리는 선험적으로 복수의 인격과 경험이 하나의 주체로 연결된다는 걸 이해하고 있지만, 동시에 역설적으로 ‘거짓말’을 통해 그 연결이 얼마든지 끊어질 수 있음을 증명한다. 거짓말이란 행위 자체가 연결의 절대성이 깨질 수 있음을 증명하는 셈이다. 만약 자아가 쪼개질 수 없는 단단한 다이아 같은 실체라면, 우리는 결코 자신이나 타자를 속이거나, 타인에게 가공된 자아를 제시할 수 없을 것이다. 거짓말은 내가 나의 ‘연결’을 인위적으로 끊거나 비틀 수 있다는 가능성 위에서 성립한다. 또한 빈번하게 발생하는 ‘기억의 오류’ 역시 우리가 믿고 있는 통시적 연결선이 얼마나 위태로운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잇는 끈이 언제든 헐거워지거나 끊어질 수 있는 얇은 실타래임을 알기에, 더욱 치열하게 기둥을 붙잡으려 애쓰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인간의 자유는 고정된 진리나 자본에 종속되지 않고, 이 흐름과 위태로움을 인지하는 데서 출발한다. 확신이란 불완전성은 잠시 넣어두고, 사유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은 그러한 겸허함을 획득함과 동시에, 쏟아지는 물줄기 속에서 자신만의 기둥을 세우려는 의지를 가진 존재이다. 그것이 타인의 생각이나 외부의 압력(노예적 삶)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그릇에 담길 분포를 스스로 조율하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