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 특강 논술 수업

(이전에 금리 등 경제학 지문 수업을 한 후에 진행한 수업)

by Kn

사실 세상을 살다 보면 그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감과 저항을 본능에 품은 인간은 미묘한 오차율을 바로잡으려 하는 섬세함까지 획득할 수 있는 존재이다. SNS나 우울증을 유발하고, 짧은 동영상이 인간의 집중과 사고 혹은 고등적 사고의 지속 시간을 짧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여러 연구와 사례가 반복해서 보여 주는 결과이다. 선생님처럼 그러한 것들을 알기도 전에 그것들을 접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반대로 그것들을 알면서도 끊지 못하는 이들도 존재한다.

방학 특강

- 푸코의 판옵티콘의 비판


미셸 푸코는 판옵티콘을 설명할 때, 단순한 감옥 설계가 아닌,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의 은유로 제시한다. 핵심은 ‘보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개인 내부로 침투하여, 외적 강제가 없어도 스스로를 규율하게 만든다는 점(규율 권력)이다.

하지만 푸코는 감시당하는 인간을 지나치게 순진하게 설정하고 있다. 그래서 그가 설정한 감옥의 단순한 설정은 치명적 오류를 낳는다. 그것은 감시탑 중앙이 원형이고 감옥이 그 원형을 둘러싼다는 구조 때문이다. 감시당하는 이들은 감시자 눈의 시선이 정면과 약간의 양 측면 정도로 한정되어 있다는 걸 잘 알고, 층이 나뉘었을 경우 위아래 모두 볼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수감자는 가시성과 비가시성을 나눴다 하더라고 위와 같은 생각을 응용하여 한쪽이 시선을 끌고 다른 쪽이 불법적인 행위를 하면 걸리지 않는다는 걸 모를 수 없다.

이를 깨달은 수감자는 자신을 스스로 감시하기보다 감시에서 벗어날 방법을 연구하고, 패턴을 분석하는 데에 몰두할 가능성만 크게 높이는 것이 판옵티콘 구조이다.

이런 구조 안에서 인간은 감시를 회피하는 기술을 고도화시킬 가능성을 획득한다. ‘항상 보고 있다’라는 추상적 위협 앞에서 무기력해지는 게 아니라, ‘언제, 어디서, 어떻게 보는가’를 분석하며 살아남거나 무언가 이익을 얻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푸코는 권력을 너무 똑똑하거나 완벽하게, 감시당하는 이는 너무 ‘수동적이고 단순하며 멍청하게’ 설정했다(너희는 인간이 아니, 너희가 정말 그렇게 단순하고 바보 같을 거 같아?).

현실 권력은 그리 완벽하지 않다. 현실 인간 중 몇몇 또한 그리 순응적이지 않다. 앞서 말한 것처럼, 한쪽이 시선을 끌고 다른 쪽이 이익을 쟁취하는 행위를 수행하는 전략, 감시자의 교대 시간이나 시선 이동 패턴을 계산하는 행동은 이제 무척 자연스러운 적응 혹은 파훼 방식이다. 이런 인간의 성향을 고려한다면, 판옵티콘은 규율의 자동화 장치라기보다, 규율과의 게임판에 더 가깝다.

이러한 구조의 비판은 인간들의 사유 체계가 얼마나 치밀한 발전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지, 감시라는 것이 어떤 방향으로 인간을 몰아붙이거나 끌고 갈 수 있는지를 잘 보여 주는 예시가 될 수 있다.

한쪽의 가시성이 과도하게 확보되는 순간, 즉 감시와 피감시 사이의 균형이 무너질 때, 그 불균형은 곧 상대에게 극복의 가능성을 열어 준다. 또한, 피감시자가 그것을 극복했을 때 또다시 감시자는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치열하게 머리를 굴릴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한다. 인간 사회의 흐름은 이러한 현상의 반복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법이 계속해서 보완되고, 만들어지는 것을 떠올려보자). 우린 푸코의 판옵티콘을 비판하면서 가능성의 열림과 사회 현상의 큰 흐름을 볼 수 있다.



1. 완벽한 통제는 과연 불가능한 것일까?

(만약 내가 감시자라면 완벽한 감시를 위해 어디까지 계산하고 고려할 것인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최 - 패턴 분석이 핵심이거든. 인간들의 사고의 한계점은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해. 유사한 패턴을 보이는 인간들이 매우 많을 거라고도 생각하고, 맹점을 파고들어서 돌파해내봤자 그것 또한 하나의 패턴으로 인지하고 감시 방법을 늘리거나, 징후를 미리 잡아내는 훈련 혹은 시스템을 짜거나, 애초에 원인을 제거해 버리는 것 등을 구성해 놓으면 될 거라고 생각함. 물론 정말 엄청 창의적인, 생각지도 못한 방법을 쓴다면 다시 또 그걸 타파해야겠지만. 어쨌든 어느 정도 이상 데이터가 쌓이면 패턴이 계속 읽히게 되겠지?

인간은 선구자의 패턴을 습득하면서 동시에 발전시키거나 생각지 못한 것으로 이끌기도 하는 존재. 그것은 감시자나 수감자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


2. 인간의 행위가 예측 범위 안에 들어있다면, 그것은 자유라 부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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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완벽한 통제는 ‘보는 것’ 혹은 ‘감시’가 아니라, ‘생각의 경로를 설계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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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리즘과 판옵티콘


위의 논리는 현대 SNS 알고리즘과 매우 유사하다. 우리가 무엇을 좋아할지, 다음에 무엇을 클릭할 가능성이 높은지 알고리즘은 이미 그것들을 패턴화 하여 우리를 특정한 ‘생각의 감옥’에 가둔다.

전통적 판옵티콘은 수감자들이 모두 똑같은 벽을 보지만, SNS 감옥은 수감자가 가장 좋아하는 벽지를 발라놓는다.

필터 버블은 사용자의 패턴을 분석해 그가 보고 싶어 하는 정보만 계속 공급한다. 이는 감옥인 줄도 모른 채 갇히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창살’과 같다. 이때 수감자는 나가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 더 재미있는 콘텐츠가 있는 ‘옆방’으로 옮겨갈 뿐이다. 시스템은 이 경로마저 패턴으로 읽어낸다.

푸코의 판옵티콘은 감시자가 억지로 쳐다봐야 했지만, 현대의 수감자들은 자신의 모든 정보를 자발적으로 헌납한다. 좋아요와 영상이나 특정 게시물을 보고 머무는 0.1초의 시간, 스크롤을 멈추는 지점, ‘좋아요’를 누르는 패턴은 모두 시스템에 보고되는 ‘자발적 감시 보고서’가 된다.

알고리즘은 사용자가 무엇을 할지를 스스로 결정하도록 이끌기보다, ‘너는 예전에도 이랬으니 이번에도 이걸 좋아할걸?’이라며 선택지를 좁혀버린다. 이는 결국 사유의 확장, 자유의 한계로 이어진다.

푸코의 판옵티콘은 시선의 사각지대가 존재했다. 덕분에 수감자들은 작당모의를 하며 그것의 파훼를 고민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대의 알고리즘 판옵티콘은 너희의 뇌 속 패턴을 읽고, 사각지대를 찾으려 고민하는 그 고민의 패턴조차 이미 데이터화했을 수 있다. 너희는 과연 그 굴레에서 도망칠 수 있을까?


과연 나는 수감자인가? 자유를 향유할 줄 아는 존엄한 인간인가?


1. 우리는 알고리즘이라는 감옥에서 나가고 싶어 할까,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해 주는 ‘더 넓은 감옥’을 원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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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리즘의 미학


인간의 삶은 유한하다. 인간의 삶은 지루함의 연속이다. 학생들의 삶은 강제성과 핍박으로 점철되어 있다. 사회로 나간다고 해서 달라질까? 그렇지 않다. 어른이 되어서도 의무가 있고,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들이 곳곳에 넘실거린다. 그중에 어떤 것은 나에게 즐거움과 재미를 줄 수도 있지만, 어떤 것은 지루함과 고리타분함, 벗어나고픈 욕망을 자극할 수 있다.

인터넷의 연결이 있기 이전 인간들의 사유와 정보는 매우 한정적이었다. 그 특성을 이용한 일부 부유층 혹은 지식인들만이 그것을 이용하여 특권화하고, 부를 축적하곤 했다. 하지만 인터넷이 연결된 후, 스티브 잡스가 우리에게 스마트폰을 쥐여준 후엔 어떤 것들이 달라졌을까?

정보의 공유, 원활한 속도를 제공할 수 있는 소통의 통로, 무한한 연결과 무한한 확장, 실시간 공유와 실시간 관람. 여전히 고급 정보라 불리는 소수만이 소유하는 정보들이 존재하지만, 손안에 인터넷을 개인들이 쟁취하기 전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들을 개인은 손에 쥘 수 있게 되었다.

SNS나 유튜브는 상대적 박탈감으로 인한 우울증 유발, 보여 주기식 인생의 포장, 증오나 혐오 등의 빠른 전파, 중독으로 인한 시간의 허비, 뇌를 타자에게 의탁하는 판단력의 상실 혹은 마비, 알게 된 혹은 접하게 된 정보에 대한 신뢰성 판단과 조심성의 마비, 욕설이 주는 짜릿함 혹은 통쾌함의 쾌락 중독, 나는 이런 굴레에 빠뜨린 이들에 대한 저항 혹은 분노 의지 상실, 설계자들을 보지 못하고 눈앞의 것만을 보고, 향유하는 단순한 사고방식 등을 낳곤 한다.

책임 없는 비난, 모른 척하기 좋은 수많은 이용자의 숫자 속 가면과 망각, 상처를 주었다는 주체 혹은 가해자라는 인식을 가려주는 삭제 버튼과 범람하는 댓글이나 글 속의 파묻힘, 현실과 인터넷 공간 속 존재의 분리 혹은 감춤.

이러한 단점들은 즐거움, 재미 등의 단순한 감정들로 인해 묻히거나 인지되기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내 지루한 일상의 가뭄 속 단비이자, 뇌를 망가뜨려 고등적 사고 자체를 멈추게 하는 브레이크이기 때문이다.

어렵고 복잡한 사고를 좋아하는 인간은 드물다. 그런 사고를 하는 이들의 세상은 단순한 즐거움이나 재미와는 거리가 멀 수도 있다. 무엇이 더 좋고 나쁘다는 이분법적인 사고는 위험하다. 내가 죽기 전까지 ‘남는 시간’에 소소한 즐거움과 재미를 제공해 준다면, 그것만큼 소중하고 고마운 존재가 또 있을까?



내 삶의 설계자


알고리즘의 미학에 빠져든 자는 삶의 설계에서 영영 제외되는 존재일까? 그렇지 않다. 이 세상은 더 넓게, 더 멀리 보는 이들에 의해 ‘혁명’이 일어나기도 하고, ‘숙고’가 일어나기도 하며, 그로 인한 ‘각성’이 발생하기도 하는 곳이다.

인간 중에 수동적 존재가 없으리라는 기대는 허무하고 허망한 기대에 불과하다. 다만 어딘가 혹은 누군가가 문제를 제기하면, 그 문제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단순한 일이다. 즐거움, 재미 등의 단순한 감정들처럼.

선생님이 SNS를 끊은 것에는 다양한 이유가 존재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내 온전한 의지대로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 의지나 누군가의 설계도 안에 떨어져서 그것이 내 의지인 것처럼 착각하며 사는 의지가 아닌, 정말로 온전한 내 의지로 사는 삶.

사실 세상을 살다 보면 그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감과 저항을 본능에 품은 인간은 미묘한 오차율을 바로잡으려 하는 섬세함을 획득할 수 있는 존재이다. SNS나 우울증을 유발하고, 짧은 동영상이 인간의 집중과 사고 혹은 고등적 사고의 지속 시간을 짧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여러 연구와 사례가 반복해서 보여 주는 결과이다. 선생님처럼 그러한 것들을 알기도 전에 그것들을 접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반대로 그것들을 알면서도 끊지 못하는 이들도 존재한다.


1. 왜 사람들은 알면서도 저항하거나 끊어내지 못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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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좋은 삶이란 내 의지대로 사는 삶일까, 의지의 뒤섞임 속에서 사는 삶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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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SNS나 짧은 동영상의 장점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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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위의 것들의 단점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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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순서를 이렇게 설계한 이유 – 이 순서로 해야 ‘아 난 왜 못 끊고 살지?’라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혹은 덜 느끼게 해 주기 위해. 시스템의 문제를 나약한 학생의 죄책감으로 전이시키고 싶지 않다. 즉, 규율 권력의 타파. 그게 세상을 찔끔 더 살아본 선생님이 제자들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함.)



- 다음 수업 예고

우주를 관찰하는 눈과 사회를 관찰하는 눈


글에 대한 이해는 현상에 대한 상상력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개념에 대한 설명들은 모두가 누군가의 호기심이나 연구로 인해 탄생한 결과물들이며, 거기에서 파생된 현상 혹은 이론, 현상의 관찰에서 다시 또 뻗어 나온 줄기들은 또 다른 호기심을 자극하고, 또 다른 이론이나 통찰을 낳는다.

우리들이 글을 쓰는 것 또한 그와 다르지 않고, 글을 읽는 것 또한 그와 다르지 않다. 그것들은 모두 세계와의 상호작용이며, 세계를 이해한 이들과의 상호작용이고, 세계들 이해하려 애쓴 이들과의 소통이다.

상대성이론과 특수상대성이론을 이해하고 보는 우주와 현상, 금리나 환율 등을 이해하고 보는 사회와 현상, 다양한 비유법과 묘사 방법, 문장 구조 틀 등을 이해한 후 보는 시와 서술의 방식과 소설의 인물과 사건, 갈등 등을 이해한 후 되새겨보는 소설. 이 모든 것들의 방식은 결국 하나의 맥락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읽어내는 것이 단순한 읽어 내려감이 아닌, 통합 작용이라는 걸 이해한다면, 앞으로 접하는 모든 것들을 표면만 훑는 것이 아닌 그 이면의 것, 운이 좋다면 남들이 보지 못한 완전히 새로운 것을 보게 될 수도 있다.

읽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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