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온 킹과 현상학>
(가)
필자는 어린 시절 봤던 애니메이션 한 편을 아직도 즐겨보고 있다. 그 작품은 제목에서도 볼 수 있듯 <라이온 킹>이라는 작품이다. 아직 그 작품을 붙잡고 있는 이유는 ‘두 개의 큰 통념의 조류’가 한 화면 안에서 동시에 흐르는 방식 때문이다. 첫 번째 조류는 무파사라는 거대한 존재가 보여주는 질서의 통념이다. 그 질서는 단순한 권위나 지배가 아니라, 자연의 섭리와 규칙, 규율, 그리고 ‘용기의 지혜로운 선택적 발휘’로 나타난다. 심바는 무파사를 ‘친구 같은 아버지’로 여긴다. 그 표현 속에는 강압적 통제와 구별되는 따듯함이 들어 있다. 힘이 있되 함부로 휘두르지 않음과 규칙을 말하되 공포로 강제하지 않는 규칙. 그래서 무파사의 질서는 인간이 사회 속에서 흔히 떠올리는 ‘감독과 통제’와 결이 조금 다르다. 그것은 선한 도덕적 명령이라기보다, 생존과 연쇄의 조건에 가까운 세계의 방식이자 큰 흐름이다.
두 번째 조류는 티몬과 품바가 대표하는 자유의 통념이다. 그 자유는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삶을 꾸리는 자율성의 형태로 제시되며, 동시에 질서의 요구를 “일부러 외면하는 무시, 즉 하쿠나 마타타”로 드러난다. 두 존재는 지나치게 사랑스러운 경쾌한 콤비로 등장하여, 무거운 세계에서 한 발 비켜나 있는 듯한 삶을 보여준다. 저 유명한 구호는 심바에게 구원이 되고, 걱정의 중단을 약속한다. 책임의 긴장과 불안을 내려놓을 수 있게 돕는 말. 바로 그 “무질서한 자유로움의 통념”이 주는 매력에 아기였던 나는 푹 빠져 있었다.
이 세계는 저 둘의 조화이다. 작품은 그 사실을 아주 이른 시기에, 설득력 있는 방식, 유쾌한 방식으로 보여주었다. 그래서 여전히 그 작품을 즐길 수 있고, 비판할 수 있고, 분석, 정리할 수 있는 것일지 모른다.
(나)
이는 단순한 작품 해설을 넘어 ‘세계관을 처음 획득한 순간’에 대한 기록일지 모른다. 무파사의 질서는 ‘억압으로 제시되지 않는 질서’. 그리고 그 질서가 ‘지켜야 할 것’이라기보다 ‘이해해야 할 것’으로 그려지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티몬과 품바라는 존재들 역시 자유가 체제를 전복하려는 반항이기보다, 책임의 긴장과 부담을 유예하는 태도 그 자체에 가깝다. 하지만 이 유예는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이 영화는 세계가 어느 한쪽의 원리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작품은 ‘질서 대 자유’의 승패를 가르려는 것이 아니라, ‘질서와 자유의 공존’이 세계의 실제 작동 방식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긴장이 깨지는 순간도 존재한다. 무파사의 질서만으로 세계가 굴러간다면 숨이 막힐 것이고, 티몬과 품바의 자유만 남으면 오래가지 못해 붕괴하거나 망가질 수 있다. 이 작품의 힘은, 어느 한쪽을 정답으로 밀어붙이지 않고, 두 원리가 서로를 필요로 하면서도 쉽게 어우러지진 않음을 끝까지 유지하는 데 있다.
(다)
작품의 후반부 심바의 각성 순간은 ‘티몬과 품바의 방식이 틀렸음을 인정하고 회귀함’이 아니다. 그들의 방식은 전혀 틀리지 않았다. 오히려 둘의 방식이 적절한 시기에 심바를 돌보지 못했다면, 심바는 죽었거나 아주 삐뚤어진 존재로 나아갔을 가능성이 크다. ‘하쿠나 마타타’라는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완벽한 타이밍에 등장해 준 완벽한 방식의 치유’였다. 심바의 전환은 그들이 가르쳐준 방식이 틀렸음을 인정하고 돌아가는 도덕적 교정이 아니다. 그 역시 ‘적절한 시기’가 존재함을 드러내는 변화이며, 존재들은 언제나 그 시점에서 가능한 방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훗날 티몬과 품바의 방식이 무조건 통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심바가 몸소 겪는 흐름이었을 뿐이다.
또 다른 미세한 차이는, 티몬과 품바가 질서 안으로 ‘들어갔다’라고 보는 순간이다. 심바의 세계로 편입된 이들은 자기들의 세계를 배반하고 체제에 편입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가치관을 바꾸었다기보다, ‘잠시 접어두고 소중한 존재를 도와준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그들의 선택은 굴복이나 굴종이 아닌, 배려이며, 삶의 원리를 상대에게 강요하지 않음을, 심지어 자기 자신들에게조차 강요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윤리적 유연성에 가깝다. 나의 가치관에 나 스스로가 굴복하는 것으로 보게 된다면, 그것은 인간이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을 벗어난 것일 수 있다. 인간은 언제든 가치관에 집어삼켜질 수 있는 존재이다.
질서 없는 자유는 곧바로 방종이라고 단정할 수 없으며, 방종이란 자유 그 자체라기보다 배려나 윤리 같은 도덕적 요소가 결여되거나 무시된 자유가 그렇게 보이는 상태이다. 반대로 자유 없는 질서는 ‘질서’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실은 감독과 통제에 가깝다. 그러므로 문제는 자유의 양이나 질서의 양이 아니라, 그 안에 타자에 대한 고려가 살아 있는지, 자율이 살아 있는지의 문제로 옮겨가야 할 것이다. 단순한 결론이 아닌, 훨씬 더 정교하고 섬세한 시선과 비판적 시각이 필요하다.
(라)
심바의 변화는 존재 방식의 부정이 아닌, ‘존재 양식의 전환’이다. 심바는 티몬과 품바의 방식이 그 시기의 자신을 살렸음을 이미 알고 있다. 다만, 성장한 심바는 ‘이제 그것이 지금의 자신에게는 충분치 않다’라는 감각을 느꼈다. ‘틀렸으니 돌아가라’라는 구조가 아닌, ‘충분했고 이제 다른 시기를 맞이하라’라는 구조이다. ‘하쿠나 마타타’는 회피가 아니라 어린 존재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생존 리듬, 책임을 내려놓아도 괜찮은 상황에서 그것을 가능케 해 주는 윤리적 유예이자, 세계가 당장 무너지는 것이 절대 아님을 보여주는 감각의 회복과 치유의 기술이다.
(마)
무파사의 질서는 절대적으로 선할 수 없고, 자연에게 선과 악의 잣대를 들이미는 것은 무리이다. 그런 시도는 세계 이해를 심판으로 바꿔버릴 가능성이 있다. 자연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으며, 그저 작동한다. 그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태도는 에포케(판단 중지), 그리고 마음이 아픔을 그저 고요히 느끼고 있음이다. ‘저런 작동 방식은 슬프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그 고요한 인식 속에서 인간의 윤리는 얼마든지 작동할 수 있다.
세계는 고정된 규범으로만 굴러가는 곳이 아니며, 존재가 변화하는 리듬과 부담의 정도에 따라 서로 다른 방식이 잠시간 유효해지는 곳일지 모른다. 어떤 때에는 질서가 생존을 붙들고, 어떤 때에는 자유가 호흡을 부여잡고, 어떤 순간에는 둘 모두가 무거워 아무런 말도 못 하는 고요함만 남을 수 있다. 그리고 그 고요함은 자연 앞에서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견뎌야 하는 지점일지 모른다.
(수능 혹은 모의고사형식으로 도전!)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정의하려 든다. 그러나 ‘나’라는 인간에 대한 서투른 확신은 자칫 잘못된 경계를 긋고, 편협한 기준을 세워 결국 스스로를 그 안에 가둬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론적 오만 혹은 오류는 내부의 감옥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외부를 향한 폭력으로 전이되기도 한다. 내가 만든 엄격한 잣대를 타인에게 들이대고 선을 넘는 언행을 일삼는다면, 그 비난의 화살은 나를 향해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설령 내가 절대적 권력을 손에 쥐고 있다 하더라도, 타인을 향한 이러한 행위는 결국 내면의 결핍이 투사된 그림자일 수 있고, 나를 파멸로 이끄는 부메랑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자아와 타인, 그리고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은 고정된 실체가 아닌, 유동적인 흐름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은 애니메이션 <라이온 킹>에 나타는 두 가지 거대한 통념의 조류를 통해 더욱 선명하게 고찰할 수 있다.
이 작품을 관통하는 첫 번째 조류는 ‘무파사’로 대변되는 질서의 세계이다. 거대한 존재이자 친구 같은 아버지인 그는 자연의 섭리, 규율과 규칙, 그리고 용기의 지혜로운 선택적 발휘라는 ‘아폴론적 질서’를 상징한다. 두 번째 조류는 ‘티몬과 품바’가 보여주는 무질서와 자유의 세계이다. 이들은 인생의 자율성을 조율하고,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거나 일부러 외면하는 ‘디오니소스적 자유’를 대변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세계가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승리가 아닌, 두 흐름의 역동적인 상호작용 속에서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흔히 심바의 성장을 두고 ‘방황을 끝내고 질서로 회귀했다’라고 해석하기 쉽지만, 이는 피상적 이해에 불과하다. 후반부 심바가 각성하는 순간은 티몬과 품바의 방식이 틀렴음을 인정하고 무파사의 세계로 복귀하는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티몬과 품바의 방식은 그 시기의 심바에게 전혀 틀리지 않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나 때문에 아버지가 죽었다는 감당하지 힘든 비극 앞에서 티몬과 품바라는 완벽한 타이밍의 조력자가 없었다면, 심바는 죄책감에 압사당하거나 스카보다 더 비틀린 존재로 타락했을지 모른다. 그들의 ‘하쿠나 마타타’는 단순한 도피가 아니라, 어린 존재가 생존하기 위해 필수 불가결했던 치유의 안식처였다. 즉, 심바의 귀환은 과거의 가치관을 부정하는 행위가 아니라, 존재들이 ‘현존재’의 방식으로 존재하기에 겪게 되는 필연적 흐름이다. 유년기 심바에게는 무질서한 자유가 치유의 방식이자 답이었으나, 성장한 심바에게는 그 방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다. 나아가 티몬과 품바가 심바를 따라 전장에 뛰어든 행위 역시 질서에 굴복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안락한 가치관을 잠시 접어두고, ‘친구를 돕는다’라는 구체적인 사랑과 우정을 위해 기꺼이 위험을 감수한 것이다. 이는 거창한 대의명분보다 관계의 윤리가 더 상위의 가치로 작동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우리는 여기서 ‘질서’와 ‘자유’의 본질을 다시 살펴볼 수 있다. 타인에 대한 배려나 윤리적 요소가 결여된 자유는 방종으로 흐르기 쉽고, 자유가 박탈된 강요된 질서는 감옥과 다를 바 없다. 그렇다고 무파사의 질서가 절대적으로 선하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그의 세계는 약육강식이라는 자연법칙을 바탕으로 한다. 이런 자연에 인간의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며 선과 악을 구분하려는 시도는 무리이며, 우리는 그저 자연의 압도적인 순환 속에서 느껴지는 아픔을 고요하게 관조할 수 있을 뿐이다. 성장은 이처럼 상반되어 보이는 가치들이 시의성에 맞게 조화를 이루거나, 서로의 자리를 내어주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기성세대는 새로운 세대를 교육할 때 종종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곤 한다. 아이에게 자유와 무질서의 탐색이 필요한 시기가 왔는데도, 자기들 눈에 좋아 보이는 질서만을 무조건적으로 휘두르는 해우이가 그것이다. 교육의 가장 어려운 지점은 ‘타이밍’을 포착하는 데 있을지 모른다. 지금 눈앞의 아이에게 필요한 것이 엄격한 질서로서의 통제 혹은 이끎인지, 아니면 무질서와 자유의 허용인지 판단하는 것은 고도의 예리함을 요한다. 물론 무질서가 방종으로 남용되지 않도록 제어하는 것 또한 필요하다. 이는 목수가 설계도대로 나무를 깎는 것이 아니라, 정원사가 식물이 자랄 수 있도록 최소한의 울타리를 제공하고 그 안에서 마음껏 가지를 뻗게 하는 것과 유사하다(가지치기가 필요할 때도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효율성과 성과만을 중시하는 현대 사회, 특히 철학적 사유가 부재한 한국 교육 현실에서 이러한 고민이 빠져버릴 때가 있다. 실패와 방황이 끔찍한 것, 혹은 한 인간을 죽이는 것으로 인식되는 ‘무균실의 환경’은 위험할 수 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정작 거대한 혼란이 닥쳤을 때 스스로를 지탱할 면역력을 갖지 못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질서라는 틀에 갇혀 아이가 겪어야 할 혹은 겪어도 되는 필연적 혼돈의 시간을 박탈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교육의 주체들은 끊임없이 고민하고 또 고뇌해야 한다. 교육은 아이가 질서와 무질서 사이에서 스스로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기다려주고, 치열한 고민의 과정을 존중하며 곁을 지키는 일이다.
“나의 아파함이 선악의 진실을 가리는 완벽한 거울이 될 수는 없다.”
일단 이렇게 일단 1차 완성. 음... 너무 짧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