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은 안 가질래야 안 가질 수 없는 것
그럼에도 편견을 갖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은 바름을 너무도 잘 아는 인간적인 것
편견을 갖는 것도 인간적인 것이지만 그것을 갖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조차도 너무나 인간적인 것이다.
세상의 중심은 내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의 관점은 항상 세상의 중심에 서있을 수 밖에 없다. 내가 보고, 내가 듣고, 내가 말하고, 내가 이해하고, 내가 받아들이고, 내가 태도로서 그것들을 표출시킨다(이해의 범주를 넘어선 태도마저도).
이는 모순적이게도 다른 인간들마저 똑같기에 중심은 중심으로. 그리고 또 다른 중심은 특정 힘에 의해 새로운 중심으로 계속해서 태어나고 부딪힌다. 그것을 잘 이해해보려는 시도를 하고자 한다면 타인 혹은 타자의 중심적 생각과 의도, 메커니즘을 유심히 살펴보아야 한다. 이를 위해선 언어나 대화가 필요할 수도 있고, 때로는 침묵이 필요할 수도 있다. 각각의 방식이 있는 법이고, 그 덕분에 이해 또한 수억 갈래로 나뉘어진다.
사회 혹은 한 집단의 부품이 되었을 때, 때때로 그것은 그저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개인은 목적과 목표와 행복, 필요성에 의해 그런 시스템 안에 귀의하게 되는 것이고, 교육과 통찰력, 그 밖의 주변 영향에 의해 자신의 위치를 재정립 시킨다거나 위의 방식 혹은 경향성이 짙은 이해 안에 머무르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은 특정 관점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만 이해될 것이었다면 마르크스는 없었을 것이고, 복지 또한 없었을 것이며, 궁극적으로 신분제의 폐지는 영원히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품이라는 조금은 부정적일 수 있고 냉소적일 수 있으며 자신을 훼손시킬 수 있는 이해의 영향력은 막강해서 무조건적으로 자신의 존엄성과 자아를 부정적으로 끌어내리고 훼손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관계의 개선, 즐거움, 행복, 가족, 친구 등을 통해 회복 되기도 하고, 조금씩 복구 되어가기도 한다.
인간은 유희를 추구하는 동물이었지만, 이제 인간은 어쩌면 생존을 위해 유희를 탐닉하는 시대를 오랜 세월 살아오게 된 것일지 모른다. 심지어 자본주의와 유희는 결합되어... 이 부분은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