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품은 사회는 왜 자식에게 많은 것을 걸게 되었는가

- 20세기 근현대 현상의 단면

by Kn

꿈을 품은 사회는 왜 자식에게 많은 것을 걸게 되었는가

- 20세기 근현대 현상의 단면


누구나 좋은 사회를 꿈꾼다. 부모라면 특히, 자식만큼은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란다. 이 바람은 따뜻한 책임감일 수도 있고, 삶의 고단함에서 비롯된 간절함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이 소망은 점점 과잉된 기대와 과열된 경쟁으로 변질되고 있다. 자식은 더 이상 ‘사랑의 대상’만이 아니라, 생존의 전략이자 유일한 희망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아졌다.

극심한 빈부격차는 이 현상의 뿌리다. 부모 세대가 겪는 불안은 단순한 소득 문제를 넘어선다. “지금은 내가 힘들어도, 내 자식만큼은 부자가 되었으면…"이라는 희망은 어느새 자식을 ‘로또’처럼 바라보는 왜곡된 정서로 바뀌곤 한다. “네가 잘되면 우리 가족도 잘된다.”라는 말속에는 사랑과 기대뿐 아니라, 무의식적인 부양 욕망과 보상 심리가 함께 얽혀 있다. 그렇기에 자식을 향한 과도한 사교육, 훈육, 조급한 비교는 단순한 교육열이 아니라, 불안과 좌절의 투사인 경우가 많다.

이 불안은 개인 심리의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다. 사회는 점점 더 냉혹해지고, 기회의 문은 더욱 좁아진다. 대다수는 평생을 성실히 살아도 상층부로 도약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안다. 그런 사회에서 사람들은 과거의 번영 시기를 미화하거나, 단순화된 신념에 매달리기 쉽다. 그 시절이 왜 번영했는지를 깊이 고찰하기보다, “그때는 이래서 잘됐다”라는 인종주의적 혹은 보수주의적 단순화에 빠지기도 한다. 결국 이 편향된 사고는 사회를 좌우 어느 한쪽으로든 극단화시키며, 각자의 진영에서 ‘진실’이라 믿는 것만을 고수하게 만든다.

그렇게 우리는 점점 더 갈라진다. 자식은 투쟁의 수단이 되고, 교육은 생존 경쟁이 되며, 정치적 신념조차 미래에 대한 불안과 좌절의 대리 표현으로 기능한다. 기회의 평등이라는 가치는 무너졌고, ‘성공’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꿈이 아니라 자기방어적 최후의 명분으로 남는다.

물론, 완전히 공정하고 잔혹함 없는 세상은 오기 어렵다. 능력의 차이, 운, 인맥, 배경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이 사회의 진짜 문제는, 그 차이를 줄이려는 윤리적 감각조차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는 데 있다.

결국 이 사회에서 아이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니다. 희망은 욕망으로 바뀌고, 사랑은 계산으로 바뀌고, 교육은 생존 기술로 전락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식을 통해 다시 살아보려 드는 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아무도 그걸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단면을 잘라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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