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동백꽃의 붉은 아이러니

by Kn

1. 서론

2. 「동백꽃」에 등장하는 소재에 대한 고찰

2-1. 투계(닭싸움)

2-2. 감자

3. 「동백꽃」에서 볼 수 있는 심리에 대한 고찰

3-1. 소년의 죄의식

3-2. 점순이의 자비

4. 「동백꽃」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전형성

4-1. 점순이

4-2. 소년

5. 결론


노란 동백꽃의 붉은 아이러니


1. 서론

「동백꽃」은 1936년 『조광[朝光]』 273쪽 ~ 280쪽에 처음으로 실린 김유정의 단편소설이다. 이 원전을 지학사에서 나온 『김유정』 단편집에 실려 있는 「동백꽃」과 비교해본 결과 내용에는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원전에는 제목과 함께 점순이를 주인공으로 부각시킨 삽화가 그려져 있었고, 아래쪽에는 두 수탉이 싸우는 모습도 함께 그려져 소설의 중심이 되는 소재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이 밖에 230여개의 맞춤법, 중세국어 표기법에 의한 차이, 사투리의 표준어 변환 등이 있었다. 그 중에서 특히 사투리의 수정은 글의 맛을 죽이는 편이라 느껴져 본론에는 최대한 원전을 그대로 옮겨놓았다.

「동백꽃」은 소년과 소녀의 순수한 사랑이 어수룩하게 피어나는 모습을 살며시 드러내 보이는 구조를 취한다. 이러한 구조 자체는 비교적 단순한 편이다. 그러나 과격한 점순이의 애정표현은 다시 읽어보아도 다소 파격적인 면이 있다. 이처럼 개성이 강한 점순이 덕택에 소설에는 독특한 소재들이 등장하고, 흥미로운 심리들이 드러난다. 이에 착안하여 본론에서는 소설에 등장하는 중심 소재들을 나누어 고찰해볼 것이며, 인물들의 심리와 전형성을 고찰해볼 것이다.


2. 「동백꽃」에 등장하는 소재에 대한 고찰


2-1. 투계(닭싸움)


오늘도 또 우리 수탉이 막 쪼키었다. 내가 점심을 먹고 나무를 하러 갈양 으로 나올 때이었다. 산으로 올라스랴니까 등뒤에서 푸드득, 푸드득, 하고 닭의 횃소리가 야단이다.

「동백꽃」은 두 수탉이 싸우는 모습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러한 닭싸움은 총 세 번 등장하는데, 중반 한 번을 제외하면 두 번 모두 점순이에 의해 일어난다.

‘붉은 선혈이 뚝뚝’ 떨어지고 ‘눈깔이 피로 흐드르하게’ 물드는 거친 두 수탉의 싸움은 보통 여성이 주체가 되어 시작되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에는 사랑에 눈까리가 뒤집어진 소녀가 등장하여 잔인한 투계를 종용하고, 새빨간 피가 튀는 싸움을 보며 ‘깔깔거리고 되도록 이쪽에서 많이 드르라고’ 웃기까지 한다. 점순이는 현대에서 흔히 생각될 수 있는 여성성 중 하나인 조신함을 비웃듯이 파괴한다. 거친 남자들의 전유물이라 생각되기 쉬운 투계를 점순이라는 소녀가 주체가 되어 매우 잔인하게 행한다. 심지어 남의 집에 몰래 들어가 닭을 빼내오는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결단을 내린 여성의 거침없고 잔인한 행동들이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점순이의 특별한 점은 편견이라 할 수 있는 여성성을 도려내고, 계층적 시각으로 접근했을 때 비로소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점순이는 권력을 가진 상위계층의 인물이다.


그렇쟎어도 즈이는 마름이고 우리는 그 손에서 배재를 얻어 땅을 부침으로 일상 굽신거린다. 우리가 이 마을에 처음 들어와 집이 없어서 곤난으로 지날제 집터를 빌리고 그우에 집을 또 짓도록 마련해준것도 점순네의 호의이였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도 농사때 양식이 딸리면 점순네한테 가서 부즈런히 꾸어다 먹으면서 인품 그런 집은 다시 없으리라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열일곱식이나 된것들이 수군수군하고 붙어다니면 동리의 소문이 사납다고 주의를 시켜준것도 또 어머니었다. 왜냐하면 내가 점순이하고 일을 저질렀다는 점순네가 노할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땅도 떨어지고 집도 내쫓기고 하지 않으면 안되는 까닭이었다.


권력자 혹은 부유한 이가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는 ‘자비’ 혹은 ‘자선’이다. 베풂이라고도 할 수 있는 행위를 점순이의 집안이 소년의 집안에 행했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자비와 자선을 기점으로, 소년의 죄의식 생성 과정이 소설 속에 잘 드러나 있다는 점이다. 인간 감정 중 하나인 ‘죄의식’의 기원 중 하나를 소설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

소년의 집은 가난했다. 그런 그들에게 점순이네는 집터를 빌려준다. 심지어 농사를 짓도록 땅까지 빌려준다. 또한 농사가 잘 안 되어 식량이 부족할 때 양식도 제공해주었다. 당연히 소년네는 고마움을 느낀다. 그러나 이 고마움은 빚과 같다. 빚을 진 집안은 갚아야 할 위치에 놓인다. 이런 상황에서 소년은 점순이의 횡포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 한 채 무력감을 느끼고 압박감을 느낀다. 심지어 정당한 저항 행위(단 한번이었지만)를 한 이후 용서까지 구한다. 더불어 앞서 말한 죄의식도 느낀다.

소년을 떠나 점순이의 시각에서 사건을 바라보자. 소년은 자신의 집안의 호의 덕분에 먹고 살게 됐다. 그런 와중에 자신은 소년이 마음에 들어서 나름대로의 호의를 베풀었다. 그랬더니 소년은 건방지게 그것을 매몰차게 거절했다. 「난 감자 안 먹는다, 니나 먹어라.」이 거절 이전 이미 점순이의 태도나 말투에 문제가 있었지만, 점순이는 이를 반성하지 않는다. 하기야 이를 되돌아보고 반성할 인물이었으면 투계 같은 잔인한 일을 행하기도 힘들었겠지만 말이다. 이 거절 이후 점순이는 자신보다 소년의 계층이 높았으면 꿈도 못 꾸었을 일을 행한다. 소년이 저항하지 못 하리라는 계산이 깔려있건 그렇지 않건 간에 어쨌든 자신이 더 높은 위치라는 것을 매우 잘 아는 점순이는 가난한 집의 닭이 시뻘건 피를 철철 흘리도록 고문한다. 아무 죄도 없는 닭에게.

이처럼 소설 속 투계는 편견적인 여성성에 의문을 던져주는 요소이자, 계층의 격차 속 폭압적인 행태가 어떻게 나타날 수 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2-2. 감자


「느집인 이거 없지」


점순이는 소년에 대한 호감을 표하기 위해 감자를 내밀며 말한다. 감자를 가지고 있지도 않고, 점순이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으며, 어머니의 충고로 점순이를 기피해야만 하는 소년은 그저 저 말이 생색내기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물론, 감자는 호감 표현이 서툰 소녀의 어설픈 시도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베풂의 상징적 요소로도 볼 수 있다. 상위 계층이자 재산이 많은 계층이 그렇지 않은 계층에게 할 수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감자 수백 개 가진 부잣집 소년에게 위와 같은 일은 가당치도 않다. 그러나 가난한 소년에게는 분명 고마워할 일이라는 것이 점순이의 사고방식이자, 부유한 계층만이 품을 수 있는 사고방식이다. 계산적이지 않은 순수한 소년은 단지 생색내기로 받아들였지만.

복잡한 감정선 상에서 점순이가 느끼는 여러 감정 중에는 ‘감히’라는 단어로 대변될 수 있는 특유의 상위 계층적 감정을 소설은 지속적으로 풀풀 풍긴다. 투계에서, 울타리 치는 소년을 대하는 태도에서, 부모를 욕하는 행위에서, 감자를 주는 모습에서 등등.

스치듯 지나가는 ‘감자’이지만, 이 감자는 점순이의 언행에 무서운 불씨가 되었다. 그리고 이 불씨는 상하관계 덕분에 더 잔인하게 활활 타오르게 된 것일지 모른다.

3. 「동백꽃」에서 볼 수 있는 심리에 대한 고찰


3-1. 소년의 죄의식


「뭐 이자식아! 누집 닭인데?」하고 복장을 떼미는 바람에 다시 벌렁 나빠졌다. 그리고나서 가만히 생각을 하니 분하기도 하고 무안도스럽고 또 한편 일을 저질렀으니 인젠 땅이 떨어지고 집도 내쫓기고 해야 될는지 모른다.

나는 비슬비슬 일어나며 소맷자락으로 눈을 가리고는 얼김에 엉, 하고 울음을 놓았다. 그러다 점순이가 앞으로 다가와서

「그럼 너 이담부텀 안그럴터냐?」하고 무를 때에야 비로소 살 길을 찾은 듯 싶었다. 나는 눈물을 우선 씻고 뭘 안그러는지 명색도 모르건만 「그래!」하고 무턱대고 대답하였다.

「요담부터 도 그래봐라 내 자꾸 못살게 굴터니?」

「그래그래 인젠 안그럴테야!」

「닭 죽은건 염녀마라 내 안이를테니」


사실 소년이 때린 것은 수탉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점순이네의 호의에 먹고 살던 소년의 집안 특성상 차마 점순이를 직접 때릴 순 없는 노릇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지속적인 괴롭힘 속에서 죄 없는 점순이네 수탉만이 복수의 가장 만만한 대상이 되었다. 갈등이 극에 치달아 수탉을 죽여버렸을 때, 소년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다. 그러나 동시에 자기 행위의 정당했음에 억울함이 복받쳐 오르고 결국 울음을 놓는다. 소년이 당하고만 있었을 때에는 느끼지 못 했던 감정인 ‘죄의식’이 수탉을 죽임으로 인해 피어오른다. ‘죄’ 그 자체는 이처럼 물질을 통해 느껴지기 쉬운 것이다. 니체는 이러한 관념에 대해 일찍이 의문을 던진 바 있다.


지금까지의 도덕의 계보학자들은, 예를 들어 ‘죄sculd'라는 저 도덕의 주요 개념이 ’부채schulden'라는 극히 물질적인 개념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막연하나마 생각해본 적이 있었던가?


위는 니체의 저서 「도덕의 계보」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죄’는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인간이 태생적으로 근본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일까? 갓난아기들은 이미 ‘죄의식’을 지니고 있는 존재들일까? 많은 연구가 수반 되어야 하겠지만,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보는 쪽이다. ‘죄’라는 개념은 타자화 된 대상이 존재할 때에야 비로소 성립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진다. 이러한 환경이 갖춰지지 않는다면 인간은 죄의식을 느끼기는커녕 구경도 하기 힘들었을지 모른다. 어쨌든, 니체에게서 힌트를 얻은 것은 바로 ‘죄의식’ 자체에 대한 고찰이다.

소설 속에서 소년은 인간이 ‘죄의식’에 다다르는 하나의 길을 보여준다.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자비’ 혹은 ‘베풂’을 받은 이는 상대의 눈 밖에 나는 행위를 하기가 몹시 힘들어진다. 호의를 받아들이는 그 순간 그러한 위치는 매우 공고해진다. 또한, 소설 속에서 소년의 부모는 소년을 타이르며 이를 더욱 고착화 시킨다. 그리고 소년은 그 상황에서 지독히도 우연스럽게 괴롭힘을 당하며 곤란한 상황에 처한다. 심지어 억울하게 당하기만 하다가 상대의 수탉을 죽이는 행위를 한 이후, 잘못했다는 ‘죄의식’만이 휘몰아침을 느낀다. 그리고 자신이 죽을 길에 들어섰다고까지 생각한다. 자신 뿐 아니라 부모에게까지 피해가 감을 잘 아는 소년에게 이러한 휘몰아치는 죄의식이 주는 압박감은 정말 엄청났을 것이다.

소설에서는 이러한 과정이 매우 짧지만 강렬하게 전개된다. 통쾌한 복수 이후 급격히 무너져 내리는 소년. 그리고 소년에게 휘몰아치는 죄의식. 삽시간에 매우 거대한 존재가 되어 소년에게 다가가 자비의 손을 내미는 소녀. 소설은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 우연히 주어진 기회를 이용하는 점순이의 잔망스러움으로 마지막을 장식한다.

3-2. 점순이의 자비


소설의 마지막 아주 짧은 시간에 소년에게 휘몰아치는 이 상황을 점순이는 아주 유쾌하게 이용한다. 점순이는 마지막 사건을 통해 소년을 쟁취하면서 동시에 ‘자비’를 베풀 위치에 올라선다. 소설 속 등장인물의 관계는 채권자의 위치에 있는 점순이와 채무자의 위치에 있는 소년이라는 니체적 시각으로 대체해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마지막 장면은 자신의 부모의 유산을 공유하는 점순이가 그것을 통해 자비를 베푸는 맛을 아마도 처음으로 맛보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정의는 지상의 모든 선한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을 지양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러한 정의의 자기 지양 : 이것이 어떤 미명으로 불리는지 사람들은 알고 있다-이것이 자비이다. 그 자체로 잘 알려져 있듯이, 이것은 좀더 강한 자의 특권이며, 더 잘 표현한다면, 그가 가진 법의 저편이다.

니체는 일찍이 정의의 자기지양으로 자비를 꼽은 바 있다. 소설은 채권자의 입장인 소녀가 이러한 자비를 베푸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간의 갈등을 봉합한다. 사실 니체의 철학은 보다 교묘하고 매우 잘 정돈된 자비를 말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점순이를 통해 자비가 순박하게 드러나는 그 순간은 어쩌면 니체에게 심심하고 하품 나오는 순간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순이의 자비는 매우 무서운 면이 있다. 단지 채권자의 위치에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린 아이마저 자비를 베풀 수 있다는 것이 소설에서 노골적으로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사회에 구성되어 있는 보이지 않지만 날카로운 계층 차이는 이러한 약육강식과도 같은 폭력적인 성미(性味)를 뽐낸다.

소설은 이렇게 끝이 난다. 자비를 베푸는 모습으로 갈등을 봉합한다. 그리고 동시에 독자에게 순수한 사랑이라는 달콤한 약을 발라주기까지 한다. 그러나 소설은 독자로 하여금 다시 칼을 들어 상처를 째고 그 약이 잘못된 것일지 모른다는 의문을 품게 한다.


4. 인물들의 전형성


4-1. 점순이


루카치에 의하면 인물의 전형은 평균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리얼리스트는 극단적인 인물과 상황을 다루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점순이만큼 전형성을 잘 획득한 인물을 찾긴 힘들 것이다. 그러나 당시 식민지 사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고, 점순이가 전혀 사회에 저항적이지도 않거니와 비판적이지도 않다는 점은 전형성을 완전히 상실하게 만든다.

그러나 점순이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개성적 인물이며, 사회적 위치를 갖고 있다. 플롯에서 분명한 기능을 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또한, 식민지 시대를 떠나 당시 계급제를 폐지했음에도 계층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게다가 사회에 저항하고 비판해야 할 인물로 적합한 이는 사실상 소년이다. 이렇게 점순이의 전형성은 다시 획득된다.

이 소설에는 직접적으로 식민지 사회의 모습이 드러나진 않았다. 그러나 인물의 전형성을 일제 강점기를 드러내야 한다는 하나의 기준만으로 판단하긴 어렵다. 당시의 검열을 생각하면 명확히 드러내기 어려웠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순이를 일본의 폭압적 모습, 피를 철철 흘리는 수탉을 민중들이라고 생각을 확장시켜본다면 식민지적 기준에 무조건 어긋난다고만 볼 수 없다. 이름이 주어져 있는 점순이의 위치 또한 일제 강점기의 모습에 대입해볼 수 있다. 점순이에게 당하는 이름 없는 소년과 씨암탉과 수탉은 지배를 받아 이름을 빼앗긴 조선인들의 상황과 유사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작가와 다른 작품들에 대한 연구가 매우 미흡하기 때문에 김유정이 어떠한 시대의식을 가졌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작가가 자신의 일생동안 이를 명확히 드러내지 않았다 하여 강점기의 비판적 혹은 저항적 시대의식이 무조건 결여되었다고 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당시를 살던 조선인이 일제의 잔혹한 행위를 전혀 경험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경험이 작품에 무의식적으로 투영되었나, 되지 않았나를 판단하는 것은 굉장히 괴롭고 허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명확하지 않은 부분을 제쳐두고 전형성을 따질 때, 점순이에게서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인물이 갖는 개성이다. 점순이는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투계를 통해 비웃듯이 여성성을 허물고, 계층적 우위를 통해 폭압적으로 남성의 삶을 잠식해간다. 보통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남성들이 하는 행위를 김유정의 「동백꽃」에서는 여성이, 그것도 열일곱의 어린 소녀가 행하고 있다.


4-2. 소년


소년은 당시 극빈층과 유랑민의 상황을 대변한다. 집이나 농사지을 땅조차도 없어 떠돌다가 겨우 정착하는 상황. 호의를 받아 농사를 지었음에도 먹을 게 부족하여 구걸하고 겨우 끼니를 해결하는 상황. 이러한 것들이 모두 소년이란 인물에게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소년은 계층이 보다 우위에 있는 인물에 의해 괴롭힘 당하고, 부모에 대한 폭언까지도 듣는다. 이 모든 것을 순수한 사랑이라는 이름의 노랗고 아름다운 동백꽃으로 덮기엔 그 색이 너무도 붉다.


루카치는 전형적인 인물을 창조할 때 중요한 것은 역사에 대한 올바른 전망과 진보에의 지향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만 본다면 이 소설은 등장인물을 통한 올바른 전망과 진보에의 지향이 매우 부족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독자의 수용까지도 따져봤을 때, 동백꽃은 스칠 듯 가볍지만, 분명 당시의 불안정한 상황을 소년을 통해서 노출시키고 있다. 독자가 부조리한 상황을 보고 위의 두 가지를 스스로 획득하기 용이할 때, 도대체 어디까지를 작가의 의도로 보아야 하는지 애매해진다. 심지어 작가가 의도한다한들 그것이 독자들에게 무조건 통할 것이라는 보장은 그 누구도 할 수 없다. 「동백꽃」은 등장인물에게서 둘 모두를 획득하는 것에 실패했다. 그러나 작가가 올바른 전망이나 진보에의 지향을 직접적으로 소설에서 드러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소년을 보는 독자의 고찰을 통해 올바른 전망과 진보에의 지향이 획득될 수 있다는 점이 이 글을 통해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5. 결론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이 소설은 매우 비판적으로 취급 받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앞서도 얘기하였지만, 사실 소설 속 이야기 구조는 매우 단순하다. 작가는 소년의 고뇌 따위는 쓰고 있지도 않으며, 그저 담담하게 당하고 있는 소년의 모습만을 그린다. 그리고 동시에 그 위에 군림하여 순수한 사랑을 펼치는 소녀를 그린다. 이렇게만 본다면 이 소설은 매우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이렇게 그려놓았을 때에 비로소 고뇌의 빈자리, 비어버린 저항의 궁핍함이 더욱 부각될 수 있다. 이런 빈자리 덕분에 독자는 이를 더 크게 느끼고 저항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저 소설 속에 그려진 소년의 고뇌에 동조하고 쫓아만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소년이 되어 새롭게 스스로 고뇌해본다. 이같이 역동적인 힘을 소설은 그 내용을 비워버림으로서 획득한다.

물론, 이 부분에서 소년처럼 사느냐, 더 나아가 문제 제기를 해보고 고찰하느냐의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 겉보기에 계층 간의 차이에 의해 발생되는 죄의식이나 자비 등에 관하여 우리가 알아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라는 물음에서 끝날 수 있다. 그러나 소년의 죄의식이 무엇에 의해서, 무엇 때문에, 어떤 식으로 발생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고 깨닫게 되면, 그저 휩쓸리듯 밀려 넘어져 허망하게 「그래그래, 인젠 안그럴테야!」라고 외치지 않을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동백꽃」은 마르크스의 물음에 대답하듯, 이 시대에 새로운 물음을 또 다시 찾아가게 도와준다. 시대를 뛰어넘어 새 시대의 독자는 기존의 소설을 통해 자신의 관념들을 대입해본다. 그리고 또 새롭게 물어간다. 어째서 죄의식이 소년에게 억압적으로 뒤집어 씌워졌는가,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과연 가능하기는 한가, 벗어나서 뭘 어쩌란 말인가 등등. 그렇지만 벗어나야 만이 소년은 거대한 권력 앞에, 그것을 공고히 지니고 있는 세상에 대해 의문을 품고 저항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물음과 저항이야말로 바로 우리가 지금껏 세상을 바꿔온, 즉 평등과 옳음, 선을 위해 행해왔던 계급제와 노예제 폐지 등의 발판이 되어왔다. 이러한 시각으로 본다면 소년은 다름 아닌 이 세계에 존재하는 우리들 자신이고, 아직 알을 깨고 나오지 못 한 세계에 갇혀 있는 존재들이 아닐까.

조금 더 마르크스의 물음에 답하자면 이렇다. 다른 시대의 작품이라 할지라도 현 시대에 통용되는 물음을 독자는 작품 안에서 찾아내곤 한다. 심지어 때로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새롭게 만들어내기도 한다. 「동백꽃」에서 찾아낼 수 있는 물음들은 이러한 것들이 아닐까 싶다. 권력 혹은 권위 앞에서 죄의식을 느끼고, 자비를 받는 이가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일까? 최선의 인간다움은 무엇일까? 그저 받아들이고 순응하며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결과를 바로 낳을 수 없는 고생스런 과정 같은 물음들이지만, 이것은 동시에 「동백꽃」이 주는 결과이기도 하다.


◆ 참고문헌


1. 기본자료

김유정, 「동백꽃」, 『조광[朝光]』, 1936. 5.

김유정, 『김유정』, 지학사(志學社), 1985.


2. 단행본

박태상, 이상진 공저, <문학비평론>, KNOUPRESS, 2014.

M.마렌 그리제바하, 장영태 역, <문학연구의 방법론>, 홍성사, 1982.

나병철 외, <소설이란 무엇인가>, 평민사, 1991.

니체, 김정현 옮김,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책세상, 2002.




.. 결론이 너무 엉망진창이네....(나중에 수정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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