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누군가를 바라보며 판단한다. 그 판단은 때로 순간적이고 날카롭고, 때로는 축적되고 복합적이며, 언어를 통해 확정된 의미처럼 외화된다. “어린애 같다", “성숙하다", “유치하다" 같은 말들은 그 사람이 한순간 보인 태도일 뿐임에도, 마치 전체 존재의 본질을 관통하는 진단처럼 작용한다. 그러나 인간은 단지 하나의 행동, 하나의 말, 하나의 표정으로 규정되기엔 너무나 복합적인 존재다. 그렇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순간 판단’과 ‘종합 판단’ 사이를 오가며 흔들린다. 그 진동은 인간 관계의 뿌리 깊은 오해이자, 동시에 이해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이 판단은 ‘언어’라는 틀 속에서 고정되고 굳어진다. 언어는 판단을 표현하는 도구인 동시에, 판단을 강제하는 구조로도 기능한다. “안 했다”와 “못 했다”는 질문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한 감정과 사정들은 언어 속에서는 갈라지고 선택되어야만 한다. 이 강제성은 단지 문법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타인을 이해하는 방식 그 자체에 영향을 미친다. 사람들은 종종 타인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말의 구조가 규정한 정답만을 듣는다. 이것이 바로 '언어의 강압 구조'이며, 이 구조는 판단을 '진실'처럼 가장하게 만들며, 오해와 단절의 기제가 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왜 인간은 이렇게 쉽게 언어의 구조에 갇히는가? 왜 우리는 판단이 유동적이고 불완전하다는 걸 알면서도, 말을 통해 그 판단을 고정하고 타인을 고착화하려 하는가? 바로 이 지점에서, 너의 '분포 이론'은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복합적인 분포를 지닌 존재’이며, 그 분포는 시간, 맥락, 관계, 감정에 따라 끊임없이 달라진다. 그러나 언어는 그 분포를 일정한 틀에 담는 ‘그릇’ 역할을 하며, 이 그릇이 단단하고 작을수록 내용물은 과잉 압축되거나 왜곡되기 쉽다. ‘착시’는 이 순간 발생한다. 즉, 언어는 분포의 흔들림을 고정시키며, 판단을 단일화된 형태로 착각하게 만든다.
따라서 진정한 이해란 단순히 올바른 말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가진 분포의 형태와 그것이 변화하고 흐르는 방식을 감각적으로 인식하는 데 있다. 이 감각은 훈련되어야 하며, 그것이 바로 네가 강조해온 ‘분포 기반 감수성’ 또는 ‘분포 감각 회복’이다. 이는 단순히 정답을 찾는 언어 훈련이 아닌, 맥락 속에서 복합성을 존중하고 판단을 유보할 수 있는 인지적 유연성을 기르는 과정이다. 나아가 이것은 교육과 사유, 언어 윤리의 실천적 방향과도 맞닿아 있다.
언어에 갇히지 않고, 분포의 본래 흐름을 감지할 수 있는 존재. 말보다 침묵이 필요할 때를 아는 존재. 그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생략되었는지를 감지하고 질문할 수 있는 존재. 이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유의 태도일 것이다.
우리는 판단을 멈추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 아니면 오히려 판단을 멈추지 못하는 존재이기에, 더 정확하고 더 깊은 분포의 감각을 갖추는 수밖에 없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