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는 정의를 외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거리에서도, SNS에서도, 미디어에서도, 사람들은 저마다의 분노와 정당성을 내세우며 “정의”를 말한다. 그러나 이 뜨겁고 확신에 찬 정의의 외침 속에서, 정작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고전적이고 본질적인 물음은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지금 우리가 ‘정의'라는 이름 아래 무엇을 하고 있는지, 또 되묻게 만든다.
정의는 더 이상 탐색과 숙고의 결과가 아니다. 많은 이들이 ‘정의’를 상대에게 현실의 고통을 경험하게 하고 그로부터 자신이 옳았음을 입증받기 위한 감정적 수단으로 삼는다. 정의는 판단의 출발점이 아니라, 확증의 종착점이 되었다. 이제 누군가를 설득하거나 스스로를 성찰하기보다, “너도 겪어봐야 알아”라는 말로 상대를 끌어들여 자신과 같은 입장에 서게 만드는 감정적 강제의 시대가 되었다. 이는 마치 정의가 ‘관념’이 아니라 ‘응징’이 되어버린 듯한 인상을 준다. 흥미롭게도, “너도 겪어봐야 안다"라고 주장하는 이들 중 상당수는 정작 자신들도 그 말을 듣는 상대방이 겪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로 그 고통스러운 ‘경험'을 직접적으로 겪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들은 고통을 겪은 타인의 이야기, 언론 보도, 사회적 증언 등 간접적인 ‘분포'(정보)를 통해 그 경험의 끔찍함과 중요성을 ‘이해'하고 ‘인지'한다. 그리고 그 인지를 바탕으로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직접 겪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며, 그 결론을 타인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직접 겪어야 한다는 주장'은 자신들이 직접 겪지 않은 경험에 대한 간접적인 지식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역설은 지식 전달과 공감의 어려움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직접적인 ‘체험 분포'가 가지는 깊이와 충격은 간접적인 ‘정보 분포'로는 온전히 전달되기 어렵다. 그러나 ‘직접 겪어봐야 안다'라는 주장은 지식의 전달 방식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에게는 소통과 이해의 장벽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는 ‘분포'를 나누는 방식이 ‘직접 체험'이라는 단 하나의 경로로 제한될 때, 오히려 이해와 공감의 문이 닫히는 결과를 낳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감정적 고통과 함께 전달되는 ‘너도 겪어봐야 알아'라는 메시지는 ‘공감적 분포'를 활성화시키기보다 방어 기제나 단절을 유발할 위험을 내포한다. 결론적으로, “너도 겪어봐야 안다"라는 주장은 직접 경험하지 않은 이들이 간접 정보를 통해 경험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내린 결론인 경우가 많으며, 이는 지식 전달과 공감의 어려움을 반영한다. 이 주장이 소통을 단절시키는 방식으로 사용될 때, 그것은 지식의 깊이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으면서도 역설적으로 이해와 공감을 가로막는 장벽이 된다. 진정한 이해는 ‘직접 겪었는가'라는 단 하나의 기준으로만 결정되지 않으며, 다양한 ‘분포'(간접 경험, 공감, 분석)를 통해 타인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려는 ‘의지적 노력' 속에서 비로소 가능해진다.
철학자 롤즈는 ‘무지의 베일’ 개념을 통해 정의란 자신이 어떤 입장에 처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내리는 판단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곧 타인의 삶을 이해하려는 공감과 지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고통스러운 추론의 과정이다. 그러나 현대의 많은 정의감은 이와 정반대다. ‘정의’는 어느새 편을 가르기 위한 구호가 되었고, 소속감을 확인받기 위한 명분이 되었으며, 감정적으로 더 많은 지지를 확보한 쪽이 정의롭다는 착각이 지배하고 있다.
정의란 본디 쉬운 것이 아니다. 진정한 정의는 어떤 입장에 서더라도 양쪽 모두의 사정을 이해하려는 처절한 노력 속에서, 한계와 모순을 드러내는 자기비판 속에서 비로소 도출된다. 그 과정은 늘 아프고 모호하며, 자기를 부정하는 순간들을 동반한다. “장점이 가진 단점까지 털어보는 것”이라는 말처럼, 정의는 자신이 지지하는 가치의 그림자까지도 바라볼 수 있을 때 가까워지는 것이다. 정의는 ‘감정’이 아니라 ‘긴 호흡의 성찰’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런 정의의 ‘과정’을 외면하게 되었을까? 그 배경에는 현대 사회의 구조적 특성이 놓여 있다. 정보는 넘쳐나고, 시간은 부족하며, 감정의 자극은 점점 더 즉각적으로 소비된다. SNS는 빠른 판단을 조장하고, 숙의의 시간은 생략되며, 그 대신 ‘감정적 연대’와 ‘즉시적 확신’이 정의의 자리를 차지한다. 이렇게 우리는 성찰 대신 ‘확증’으로, 이해 대신 ‘적대’로, 조율 대신 ‘승인 요청’으로 정의를 소비하고 있다.
오늘의 정의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감정으로만' 소비된다. 고통스럽게 고민하며 도출하는 과정은 제거되고, 감정적 정당화와 소속감이 정의의 대체물처럼 유통된다. 이로 인해 정의는 감정의 단락(short circuit)에 빠지고, 우리는 진정 무엇이 옳은지보다 ‘내 감정이 옳다’는 확신 속에 머물게 된다.
이런 시대 속에서 '정의'를 다시 사유한다는 것은, 단순히 누군가의 잘잘못을 가리기보다, ‘나는 왜 그것을 정의라 믿었는가’라는 물음을 던지는 데서 시작된다. 타인을 끌어들이는 증명 대신, 나 자신에게 던지는 오래된 철학적 질문들 속에서, 정의는 비로소 살아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비판과 성찰 속에서도, 인간이 서로를 향해 손을 내밀고 이해하려 노력하는 희미하지만 꺼지지 않는 따뜻함 또한 이 시대에 존재함을 기억해야 한다. 모든 것이 차갑고 시니컬한 분석으로 환원되지 않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복잡하고도 경이로운 가능성. 그것이 우리가 마침내 놓치지 않아야 할 진실의 빛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