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만에 느껴보는 손맛인지
방학 한 달 전부터 여름방학 동안 들을 만한 연수 관련 공문이 온다. 그러면 순식간에 내 공람함이 가득 차지. 일과 후 제목만 보고 스킵 스킵 하다가 하나의 연수에 눈길이 갔다. 예술교육원 해봄에서 하는 연수였다. 미술 실기 지도 역량 강화 연수, 목공품 제작 역량 강화 연수, 작곡·편곡 역량 강화 연수 3종이었고, 1개만 신청이 가능하다. 음, 초등교사는 모든 교과를 가르치는 만능 로봇이지만, 나의 음악적 재능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그래서 일단 작곡·편곡 연수는 패스. 목공품은 하면 할 수 있겠지만 날 더운데 나무 먼지 마시고 싶지 않으니 그것도 패스. 마지막으로 남은 미술. 그래 미술은 그래도 내가 기본은 하지 후훗!
그래 미술 실기 연수를 신청하는 거야! 근데 뭐냐? 달랑 20명 모집이라고! 날 더운데 5일이나 가서 하는 연수 별로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그런데 그중 화요일에 아주 매력적인 특강이 있었다. 시를 위한 몇 가지 질문. 나태주 특강. 아니 선생님이 왜 여기서 나오시는 거죠? 요즘 시도 아닌 시를 끄적거리고 있는 나에게 뭔가 동아줄을 내려주실 것 같은 희망이 부풀어 올랐다. 나도 시 잘 쓸 수 있어. 일단 다음 주 월요일 수강 신청부터 성공하고 보자.
하필 수강 신청 시작 시각은 월요일 아침 9시였다. 아침 9시면 딱 1교시가 시작되는 시간이다. 8시 50분 나는 연수신청 사이트에 들어가 로그인을 먼저 해둔다. 국어책을 펴 놓고 아이들이 조잘조잘 떠든다. 음음, 목소리를 가다듬고 아이들에게 부탁 아닌 부탁을 한다.
“얘들아, 오늘 선생님이 아주 중요한 수강 신청이 있어서 그러는데, 종 치고 딱 1분만 기다려주겠니?”
“네. 선생님”
“미안해, 빨리 해 볼게!”
딩동 댕동. 종소리와 함께 정신줄을 부여잡고 수강 신청 버튼을 클릭했다. 10초 만에 수강 신청 마감. 승인대기중(10명) 아, 사람들이 얼마나 빠른 거지. 내가 대기 번호 10번이라니.
아이들에게 슬픈 소식을 전했다.
“얘들아, 선생님 수강 신청 실패한 것 같아. 대기 번호 10번이야.”
“우와, 선생님, 저한테 미리 부탁하셨으면 제가 해드리는 건데. 저 게임 많이 해서 클릭 엄청나게 빨리 할 수 있거든요. 다음에 다른 거 신청하실 일 있으면 저한테 꼭 이야기하세요. 제가 하면 무조건입니다.”
“그래, 고맙다. 자! 책 펴라. 공부하자.”
돌이켜보니 대학 때도 수강 신청 그런 거 성공해 본 적 없습니다. 선배들이 꼭 피해야 한다고 말씀해 주신 교수님들 수업은 거의 다 들었네요. 주 3일, 주 4일 수업 듣고 집에 가는 애들은 신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새벽같이 PC방에 가서 대기하는 열정 그런 것도 보이지 않았으니 할 말은 없습니다만. 이번에는 총알같이 클릭한 것 같은데 결과가 이러니 씁쓸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7월 초 연수자 명단 확정 공문이 왔는데 말이죠. 제 이름이 있었습니다. 무려 제가 10번째였습니다. 아 승인대기중은 해봄에서 수강 확정 버튼을 누르지 않은 상태라는 말이었군요. 그런데 모지리 제가 대기 번호 10번으로 오해를 한 것이었습니다. 아무튼 기분이 날아갈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 반 아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얘들아, 선생님 저번에 수강 신청한 거 성공했다. 그것도 무려 10번째로.”
“우와! 어떻게 그게 되죠?”
“그러니까, 평소에 선생님처럼 착하게 살면 다 하늘에서 도와주시는 거야. 게임 할 시간에 공부나 해!”
“선생님. 이야기 전개가 이상한데요?”
“어허! 책 펴라. 공부하자.”
그리고 무사히 저는 방학을 맞이했고 이번 주 열심히 연수를 듣고 있습니다. 디지털드로잉이라고 아이패드로 그림도 그리고요. 레진 아트도 체험하고, 그리고 어제는 나태주 선생님도 만났습니다. 목, 금은 도자기 체험이 남았습니다. 이게 다 제가 수강 신청에 성공한 덕분입니다. 아니죠. 착한 저희 반 아이들이 제가 수강 신청할 동안 잘 기다려준 덕분입니다. 2학기에는 나태주 선생님이 강조하신 강제독서를 더 열심히 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