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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차원 그녀 Aug 11. 2024

선풍기에게

너에게 보내는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 

언제나 씩씩한 너였기에 우리에게 이별이 이렇게 빨리 찾아올지 몰랐다. 주인 닮아 동안을 자랑하는 너를 보고 누가 13년 된 선풍기라고 생각이나 하겠어.     


풍기야! 기억나니? 우리의 첫 만남. 2012년 4월 소중한 첫째 딸이 태어났다. 그리고 그해 여름 너도 우리 집에 처음으로 오게 되었지. 백일도 안된 예민한 딸은 밤낮으로 울어댔고, 온몸에는 땀띠 꽃이 피었다. 그런 딸을 위해 E마트에 간 남편과 나는 소음이 가장 적은 선풍기를 찾았고, 우리 눈에 띈 게 바로 너였다. 그 당시 리모컨까지 있는 너는 비싼 몸값을 자랑했고, 10만 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넌 우리 식구가 되었지.  

    

네 덕분에 그해 여름을 잘 보내고 다음 해 아들이 태어났다. 아이들은 빙글빙글 돌아가는 너의 날개를 보며 신기해했고 혹시나 호기심에 손가락이라도 넣지 않을까 전전긍긍했어. 아이들로부터 너를 보호하기 위해 네 몸통에 그물망을 씌워 쓰기도 했는데 그때 많이 답답했지?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단다.    

  

너와 함께 우리는 13년의 여름을 보냈어. 너의 날개에 끼인 먼지를 물로 씻고 말렸던 기억. 누가 선풍기 다시 조립할 거냐며 남편과 내가 실랑이하고 있을 때, 딸아이가 혀를 끌끌 차며 선풍기를 조립해 준 기억. 조그만 너의 리모컨이 사라져 온 집안을 뒤졌던 힘든 기억까지.      


우리 집 거실에는 너보다 몇십 배 강력한 에어컨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지만, 그 녀석을 더 돋보이게 해 준 건 바로 너였다. 네가 열심히 회전해 준 덕분에 집도 빨리 시원해지고 냉방비도 아낄 수 있었어.    

  

네가 이상 신호(소음, 떨림)를 미리 보내주었다면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라도 했겠지만, 갑자기 금요일 저녁 꺼져버린 너를 보며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어. 풋살 모임을 간 남편대신 나는 아들을 불러서 너를 살려보려 애를 썼다. 드라이버로 기판을 풀어서 먼지가 있는지, 끊어진 전선이 있는지 확인했지만 우리 힘으로는 역부족이었어. 옆에 있던 딸이 이러더군.

“엄마, 미련 갖지 마. 얘, 나만큼 살았어. 이제 편히 보내줘.”     


휴대폰으로 검색하니 선풍기의 평균 수명은 8-10년 정도라고 하니 너는 정말 최선을 다해 살았구나. 일말의 희망을 찾아보고자 서비스센터를 검색했는데, 내가 사는 지역에서는 너를 고쳐줄 곳이 없더라. 마지막으로 걸었던 희망도 끝이나 버리고, 그래 이젠 어쩔 수 없다.      


너의 부고를 들은 남편은 토요일 퇴근길에 네 후임을 한 명 데려왔더라. 2019년 산인데 중국애야. 당근에서 샀대. 25000원인데 네고해서 24000원에 샀다고 자랑도 했어. 너의 죽음을 애도할 겨를도 없이 새 식구를 데려오면 난 어쩌란 말인가.      


풍기야! 

월요일에는 주민센터에 가보려 해. 너의 마지막 가는 길에 네 몸에 붙여줄 폐기물스티커를 사려고. 그동안 우리의 여름을 함께 해 준 소중한 선풍기야! 정말 고마웠어! 잊지 않을게! 네 인생의 마지막 종착지가 정확히 어디인지 모르겠지만, 편히 쉬었으면 좋겠다. 행복해라! 풍기야!      


2024년 8월 11일 사차원 그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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