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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차원 그녀 Sep 10. 2023

11. hello, goodbye.

왜 하필 썩은 자두를 주워서는

 2022년, 10년 만에 지역을 달리해서 학교를 옮겼다. 편도 1시간 10분 거리. 한 달 톨게이트비와 주유비를 합치면 오십만 원이 넘었고, 진짜 이 해는 월급을 받으면 남는 게 하나도 없었다. 방을 얻을까 생각했지만 아직 애들도 어리고 남편마저 개인사업을 벌이는 바람에 집에 와서 내가 챙겨야 할 게 너무 많았다.     


  내가 맡은 3학년은 19명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 아이들은 코로나를 직접 겪으며 저학년을 보낸 탓인지 무늬만 3학년이지 하는 짓은 2학년과 차이가 없었다. 개학 첫날부터 아이들이 의자에 가만 앉아 있지 못했고, 남녀 성비도 안 맞아서 1년 내내 여자아이들 때문에 골치가 아프기도 했다. 학교도 낯설고 아이들도 낯설고 그랬지만 주변 선생님들이 ‘출근은 어떻게 하노? 힘들어서 어째. 도와줄 거 있으면 말해요.’라고 말하며 천사처럼 배려해 주신 덕분에 힘을 낼 수 있었다.     


  3월은 어느 학교나 바쁘다. 학교를 옮긴 나는 더더욱 바빴다. 근무 시간 내에 일을 다 못해서 집에 와서 컴퓨터 작업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바쁘게 지내던 둘째 주 금요일 저녁이었다. 다른 날 같으면 저녁밥을 먹고 9시 전에 잠이 들었을 텐데 이날은 11시가 넘도록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배가 아팠다. 침대에 누워도 잠을 잘 수 없을 만큼 배가 이상하게 아팠다. 쿡쿡 쑤시게 아픈 게 아니라 은근하게 복부 전체가 아팠다. 풋살을 하고 남편이 12시가 다 되어 귀가했다. 남편이 샤워하는 소리에 나는 깼고 거실로 나왔다.

“여보 배가 아파.”

“왜 뭐 잘못 먹었어? 화장실 다녀왔나?”

“아니 그 배가 아니라, 그냥 배가 기분 나쁘게 계속 아파서 잠을 못 자겠어.”

“그럼 병원 가보자. 평소와 다르게 아픈 거면 어디가 탈이 난 모양이다.”     


  응급실에 도착했다. 이때 다시 코로나 환자가 급증한 시기여서 병원에 들어가기도 쉽지 않았다. 일단 응급실 입구에서 코로나 검사를 하고 음성이어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 검사 후 10분 정도 기다렸고, 다행히 음성으로 나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보호자인 남편도 코로나 검사를 하고 나서 들어올 수 있었다. 침대에 누워서 의사를 기다렸다. 여기저기 진찰해 보면서 배가 아픈 위치를 물어보았다. 수액을 1대 맞고 내일 혹시 더 아프면 다시 오라고 말했다. 수액을 맞는 그 몇 시간 동안 응급실 전화는 수십 차례 울렸고, 환자를 받을 수 없으니 다른 병원으로 가세요.라는 말을 앵무새처럼 뱉어내었다. 열이 나는 환자는 병원 입구에서 컷 당하고 진통제만 받아서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토요일 오전 나는 수액 덕분인지 조금 정신을 차렸다. 점심으로 남편이 죽을 사 왔다. 그때 다시 살살 배가 아파지기 시작했고 너무 허기가 진 나머지 몇 숟갈 입으로 떠 넣었다. 다시 침대에 누워서 쉬고 있는데 아는 선생님께 전화가 왔다. 이야기 중에 어느 쪽 배가 아프냐고 물어서 어 지금은 약간 오른쪽 아래 배가 아프다고 하니, 거기가 맹장 위치라며 빨리 병원에 가라고 하셨다. 아뿔싸. 드디어 올 게 온 건가 싶어서 남편을 불렀다.

“여보 병원 가야 할 것 같아. 오른쪽 여기가 아파. 배 선생님이 거기 맹장 위치래”

“ 뭐야? 그럼 빨리 가서 확인해 보자.”     


  응급실 앞에 도착했다. 하필 열이 나기 시작했다. 어지러웠다. 마스크를 벗고 구석으로 가서 심호흡하니 약간 정신이 돌아왔다. 열도 약간 떨어졌고 또 코로나 검사를 했다. 그 10분 동안 최악의 상황을 상상했다. 나는 음압병실이 있는 병원으로 이송되고 수술을 할 수 있는 의사가 없어서 시간을 지체한다. 맹장이 터지는. 으악!!! 다행히 음성이었다. 의사가 왔고 어디가 아픈지 물었다. 이제는 오른쪽 아래쪽으로 배가 아프다고 상황을 설명했더니 CT를 찍자고 했다. CT를 찍었고 충수염이 맞는다며 수술해야 한다고 했다. 다행히 수술하실 의사는 있는데 수술 후에 입원할 빈 병실이 하나도 없어서 수술 후에 다른 병원으로 이송해야 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점심에 죽을 먹어버리는 바람에 나는 꼬박 6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수술대에 올라가니 몹시 떨렸다. ‘이러다 죽으면 어쩌지, 나 무사히 깨어날 수 있을까.?’ 산소호흡기를 쓰고 얼마 후 마취제가 투여되면서 정신을 잃었다. 수술은 무사히 끝났고, 남편은 떼어낸 나의 충수 돌기를 보았는데 시커멓게 곪아 있었다고 전해주었다. 그리고 갑자기 빈 병실이 1개 생겨서 나는 입원도 할 수 있었다. 진짜 올 한 해 운을 다 당겨 쓴 것 같았고 감사하고 감사했다.     


  저녁 9시가 넘어 나는 5인실로 옮겨졌다. 마취가 풀리자 나는 아프다고 끙끙거렸고, 남편은 나를 깨우기 위해서 부산을 떨었다. 내 옆자리 할머니는 짜증이 나셨다. “내가 어제도 잠을 못 잤는데, 오늘도 잠을 자기는 틀렸다. 아이고.” 화가 난 남편은 간호사실로 달려가 간호사에게 하소연했다. 1인실도 아니면서 우리 이제 병실로 내려왔는데 텃세 부린다. 너무 화가 난다. 간호사가 와서 할머니한테 이러시면 안 된다고 했지만 내가 병실에 있는 3일 동안 할머니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5인실을 1인실처럼 사용하셨다. 텔레비전 리모컨은 할머니 소유였고, 방 전체 등을 끄고 켜는 것도 할머니 보호자(아들)가 해 버리는 바람에 우리 병실은 아침 5시 30분에 불이 켜졌고, 저녁 8시만 되면 전체 방 소등이 이루어졌다. 나는 저녁 8시만 되면 시간을 보내기 위해 그렇게 병동 복도를 오르락내리락해야 했다.     


  방귀도 나오고 식사도 했고 회복도 잘 되어가고 있었다. 집에 가고 싶었다. 의사가 하루만 더 있으라고 했지만 나는 ‘집에 가서 푹 쉬어야 더 빨리 회복될 것 같다’라고 이야기해서 병원을 탈출할 수 있었다. 집에 와서 편안하게 샤워도 하고 TV도 실컷 보고 내가 자고 싶을 때 자고 소소하게 정말 행복했다. 수요일 저녁 이상한 꿈을 꾸었다. 내가 자두나무 밑에서 자두를 줍고 있었다. 자두 두 알을 잡은 나는 손을 펼쳤고 멍이 들고 썩은 자두였다. 평소 큰일이 벌어지면 다양하게 꿈을 꾸는 나는 찜찜했지만 내가 수술할 운명이었나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금요일 아침 남편 핸드폰으로 부고 문자가 날아왔고, 남편이 날 깨웠다.

“ 여보 큰아버지 돌아가셨단다.”

“ 뭐라는 거야? 잘 계시던 큰아버지가 왜? 나 어제 오후에 큰어머니랑 통화했는데, 아무 말 없으셨는데. 으앙.”     


  목요일 저녁 식사 중에 뇌출혈로 쓰러지신 큰아버지는 구급차를 탔지만 환자를 받겠다는 병원이 없어서 계속 시간을 허비하다가 늦게 부산의 한 병원에서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돌아가셨다고 한다. 내가 응급실에서 지켜본 그 의료 붕괴 현장을 큰아버지가 겪게 되실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픈 배를 부여잡고 찾아간 장례식장에서 나는 꺽 꺽 울면서 큰아버지께 마지막 인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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