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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차원 그녀 Sep 19. 2023

13. 육아는 또 다른 도전이었다.

육아는 리허설이 없다. 


  어쩌다 보니 연년생 엄마가 되었다. 쌍둥이 육아보다 더 힘든 게 연년생이라는 말이 있는데 백 퍼센트 공감한다. 더욱이나 나처럼 근처에 손 빌릴 때가 없으면 더 그렇다. 첫째는 백일 만에 어린이집에 등원했고, 둘째는 딱 돌이 지나 어린이집을 보냈다. 그 당시 학교 일을 마치고 퇴근하며 나는 ‘집으로 출근하겠습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가을이었다. 가을의 시작은 이제 소아과 출석 도장 찍기가 시작되었다는 신호나 다름없다. 어려서 그런지 큰애가 감기에 걸리면 둘째가 옮고 둘째가 먼저 시작하면 며칠 지나지 않아 큰애도 콜록거리기 시작했다. 그날은 가을비가 내렸다. 조퇴하고 어린이집으로 아이들을 태우러 갔다. 병원 전용 주차장이 없어서 노상주차장에 주차하고 내렸다. 일단 작은애는 띠로 업었다. 큰애는 걸을 수 있으니까 손을 잡아주고 오른손에는 우산까지 들었다. 비는 하염없이 내리고 작은 애는 찡찡대고 걸어가야 하는데 바람이 부니 우산까지 휘청거렸다. 아, 어쩔 수 없다. 나는 우산을 접고 큰 애를 안고 뛰어야만 했다. 그러면서 봤다. 애 1명 병원 오는데 엄마, 할머니, 할아버지 3명. 온 가족이 출동한 집을. 여유로워 보였다. 우비까지 입은 아이와 아이 손을 잡고 행복한 엄마, 아이의 짐가방을 든 할머니와 그 뒤를 따르는 할아버지까지.     

 

  우리 집 아이들은 이도 잘 상했다. 저녁마다 열심히 양치를 시켜주었는데도 충치가 자꾸자꾸 생겼다. 젤리, 사탕류는 단속을 많이 했기에 내 판단은 유전적인 영향인 것 같다. 치과는 어른인 나도 무서운 곳인데 네다섯 살 아이들이 가기에는 지옥쯤 되려나? 어린이 치과는 손님으로 바글바글했고, 아이들의 울음소리와 기계 소리까지 병원만 다녀오면 반쯤 넋이 나가곤 했다. 마취 주사를 맞고 퉁퉁 부은 입을 보며 눈물을 줄줄 흘리는 아이를 안고 달래기를 한 달쯤 한 것 같다. 큰 애 입에도 반짝반짝 은니가 2개, 작은 애 입에도 반짝반짝 은니가 2개 생겼다. 아이들은 신기한지 계속 집에 와 거울로 입속을 확인했고, 아빠에게 자랑까지 했다. 내가 너무 속상해하자, 남편은 영구치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가끔 우리 애 입속을 보며 ‘어머 재는 벌써 치과 치료를 했네’라고 한마디 날려주시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더 짜증이 났다. 이 말에는 ‘저 집 엄마는 애한테 얼마나 사탕을 먹인 거야, 이도 안 닦아 주고 뭐 한 거야’ 이런 숨은 뜻을 내포하고 있지 않을까 유추하며 나를 탓했다.      


  딸아이가 3살 무렵 수족구병에 걸렸는데 전염성 질병이라 어린이집에 갈 수 없었다. 맞벌이로 아이를 맡길 곳이 없었던 우리는 진해에 사는 큰 시누에게 아이를 1주일 보내야만 했다. 매일 밤 영상 통화로 ‘엄마 보고 싶어요’라고 말하던 착한 딸은 씩씩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그 이후에도 독감, 유행성 결막염 등으로 시댁에 1주일, 친정에 1주일 아이들을 실어 나르기를 여러 차례 하였고, 초등학교에 입학하고부터는 병원 가는 일이 일 년에 손꼽을 정도로 줄어들게 되었다.      


   작년 2월 초등학교 4학년 딸아이는 그렇게 좋아하던 피구를 하다가 새끼손가락 뼈가 부러지고야 말았다. 애가 속상해할까 봐 ‘덕분에 보험금을 다 타 먹네’라며 큰소리치긴 했지만 성장판을 건드렸을 까봐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그 부분을 아슬아슬 빗겨 금이 간 X-레이 사진을 보며 한숨을 돌렸다. 의사는 회복 기간이 4~6주는 걸릴 거라고, 1주일에 한 번씩 뼈가 잘 붙는지 확인하러 병원에 오라고 했다. 치료를 다 받고 결제하며 간호사에게 물었다.

“혹시, 다음 주 진료부터는 애 혼자 와도 진료를 볼 수 있을까요? 제가 사정상 계속 오기가 힘들어서요.”

“네, 어머니. **이가 혼자 찾아올 수만 있으면 괜찮을 것 같아요.”

“네, 감사합니다. 다음 주부터 4시에 혼자 가라고 할게요. 카드랑 챙겨 보낼 테니까 진료하고 보내주세요.”     

  집에 가는 길에 딸에게 말했다. 

“다음 주에는 혼자 갈 수 있겠지?”

“엄마가 오면 안 돼?”

“엄마 조퇴하고 오는데 1시간이야, 오늘처럼 냉동치료(?) 잠깐하고 사진만 찍고 의사 선생님 이야기만 듣고 오면 되는데? 안 되겠어?”

“그래, 그럼 혼자 가볼게.”

일주일 후 병원 진료를 마치고 딸아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엄마 오늘은 약 없어서 병원비만 결제했어.”

“그래, 혼자 씩씩하게 잘했네”

“응, 엄마. 근데 나 엄마 카드로 밑에 편의점에서 간식 좀 사도 될까?”

“응? 그래, 근데 동생 것도 같이 사서 가.”

“응, 엄마. 고마워”          


  마지막 병원 진료를 빼고는 딸아이 혼자 정형외과 진료를 다녔다. 우리 딸은 평균 또래보다 스스로 할 줄 아는 게 많다. 2020년 봄, 코로나가 시작되고 등교가 멈췄을 때 집에서 동생 점심밥을 챙겼다. 엄마 심부름으로 동네 반찬가게에 가서 기특하다고 서비스 반찬을 얻어오던 딸은 그날 늘어지게 자랑을 했다. 철부지 막둥이는 가끔씩 엄마의 심부름으로 마트에 가서 채소와 부식거리를 사다주며 남은 잔돈을 알뜰하게 챙겨가고 있다. 


  애들이 아플 때마다 나를 자책했다. 퇴근이 늦은 날 어린이집 문 앞에서 목이 빠지게 엄마를 기다리게 했던 날은 미안해서 눈물이 쏟아졌다. 열이 펄펄 끓는 아이를 밤새 간호하며 일요일 아침에 소아과에 줄을 서는 날은 하늘이 빙빙 돌았다. 리허설도 없이 실전에 바로 투입된 나는 육아라는 긴 터널을 이 악물고 헤쳐 나왔다. 그리고 다행히 아이들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씩씩하고 바르게 잘 커 주었다. 그 시간은 아이를 성장시키며, 엄마인 나도 성장하는 그런 시간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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