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세미는 사랑
네가 언제 내 곁을 떠났는지 정확히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3월, 비가 부슬부슬 오는 날이었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너를 뿌렸다.
작년 봄었다. 내가 우리 반 아이들과 환경 교육을 하려고 사서 심었던 수세미 모종 5 포기. 그 녀석은 엄청난 넝쿨을 만들어 내고, 꽃을 피워내며 가을에는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아 놓았다. 수세미에 대해 정보가 없었던 나는 블로그와 유튜브 영상을 검색해 가며 잔 지식을 모으곤 했다. 초록색 수세미는 나날이 말라 가더니 갈색으로 변했다. 갈색으로 변한 수세미는 따서 교실로 들고 왔다. 책상 위에 신문지를 깔고 수세미 껍질을 벗기고 씨를 떨었다. 검은 씨가 하염없이 쏟아져 나왔다. 불 사용이 쉽지 않았기에 수세미는 집에서 삶기로 하고 아이들 편에 싸서 집으로 보냈다.
수세미를 털어서 나온 씨는 내년을 위해 플라스틱 통에 넣어 잘 보관했다. 봄이 왔고, 나는 또 학교 텃밭 일꾼이 되었다. 청소 여사님께 수세미 씨를 드렸더니 싹을 틔워서 모종으로 키워주셨다. 그리고도 어마어마하게 씨가 많이 남았다. 나는 씨를 분양했다. 일단 친정 엄마께 심어보시라고 한 줌 드리고, 시어머니께 한 줌 드리고, 언니에게도 한 줌 주었다. 남편 가게 뒤뜰에도 조금 심었다. 그렇게 퍼 날랐지만 나에게는 씨가 많이 남았다. 나의 농사 지식에 의하면 묵은 씨는 발아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남겨뒀다가 내년에 심을 수도 없다. 아, 더 줄 사람도 없고 고민하던 찰나에 4차원인 나는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되는데........
내 계획을 남편에게 말했을 때 남편은 웃었다. “당신은 그런 생각을 어떻게 하는 거야?”
나는 걱정이 되기도 했다. 내 땅도 아니고 이거 씨 잘못 뿌려서 잡혀가는 건 아니겠지? 며칠을 고민했다. 일단 사람들 눈도 피해야 하고, 호미로 파서 씨를 심기에는 너무 눈에 띄겠지. 그래 자연스럽게 주머니에 넣어서 씨를 흘리는 거야. 세어 보지 않았지만 한 100개는 넘어 보여. 못해도 그중에 10개는 올라오겠지!
3월 말, 비가 조금 내리는 저녁이었다. 우산을 쓰고 나는 집을 나섰다. 아파트를 나와 산책길로 들어섰다. 다행히 비가 와서 그런지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나는 눈치를 살살 보며 수세미 씨를 던졌다. 나름 나는 머리를 써서 수세미가 감고 올라갈 지지대가 있는 곳을 골라서 씨를 뿌렸다. 간이 작아서 씨를 반쯤 정도 남겼다. 그리고 며칠 후에 이 짓을 똑같이 반복했다. 기대는 크게 하지 않았다. 뭐 올라오면 올라오는 거고, 죽으면 죽는 거고.
그리고는 까마득히 잊고 지냈다. 왜냐하면 그 길은 내가 산책을 하던 길이었고, 새롭게 달리기를 시작한 나는 새로운 코스로 달리기를 했다. 그 길을 지나다니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이번 여름은 유난히 더웠기엔 분명 다 죽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근데 아니었다.
지난 토요일 아들이 굳이 집에서 생일 파티를 하겠다고 우기는 바람에 친구들이 점심시간에 맞춰 집으로 왔다. 생일상을 거하게 차려준 나는 자리를 피했다. 5시에 친구들은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고, 나는 남편 사무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마저도 지겨워진 나는 혼자 산책에 나섰다. 발길이 닿는 대로 움직였고, 어라? 내가 산책을 자주 다니던 그 길이 보였다. 비가 오려고 하는지 좀 흐려서 걷기에 나쁘지 않았다. 다리를 건너고 다시 돌아가기 위해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갑자기 수세미 생각이 났고, 내가 씨를 흘렸음 직한 위치를 살폈다. 오 마이 수세미! 수세미 줄기가 뻗어 나가고 있었다. 한 포기, 두 포기, 세 포기......... 여섯 포기. 워낙 풀이 무성하던 곳이어서 예초기로 풀을 자른 흔적이 보였다. 무서운 예초기 칼날을 피한 장한 수세미 여섯 포기가 자라고 있었다. 이건 기적이었다. 나는 만세를 부르며 사진을 찍어서 카톡방에 올렸다. 난 정말 대단한 사람 같다. 자화자찬했다.
이번 주말에는 다이소를 갈 예정이다. 거기서 비료라도 사서 뿌리러 갈 계획이다. 날 추워지기 전에 얼른 자라 꽃이라도 피고 열매라도 맺으려면 한 시가 급하다. 성격 급한 나는 벌써 주렁주렁 매달린 수세미를 상상한다. 산책하던 사람들이 아니 이게 어떻게 여기에 있지? 라며 신기해하며 웃는 상상을 한다. 절로 기분이 좋다. 오늘 이 글을 읽은 당신! 가을이 깊어갈 무렵 산책길에 뜬금없이 수세미가 보인다면 하나쯤 따가셔도 좋아요. 제가 준비한 선물이니까요! 수세미는 사랑!
*초록색 수세미는 배와 도라지와 함께 즙을 짜면 감기 예방에 특효입니다. 작년에 저희 가족은 그걸 먹고 겨울을 무사히 날 수 있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