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시간에 글이나 좀 써!
미안하다는 얘기 좀 그만해
미안한 게 문제가 아니야 임마
야 미안하다가 경기 져
<출처:신인감독 김연경>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우리 집 TV는 좋은 곳으로 떠났다. 며칠 동안 화면이 흔들리더니 또 괜찮았다. 그런데 28일 저녁 무렵 아예 암흑 상태로 변해버렸다. 우리 집을 방문한 기사님은 액정이 나갔다는 판정을 내려주셨고 서비스센터에 보내면 최소 20만 원에서 최대 60만 원 이상의 수리비가 청구될 거라 말씀하셨다.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판단을 내릴 수 없었고, 그는 고치려면 다시 연락을 주라는 말을 남기고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TV 녀석과 어언 40년의 세월을 함께 보냈다. 그런데 이번에는 쓸데없는 오기가 생겼다. 그래 이렇게 된 이상 TV 없이 살아보는 거야! 남편의 반대가 거셌다. 남편은 최근 시작한 신인감독 김연경이란 프로그램에 폭 빠져있었고, 일요일 저녁에 그걸 봐야 한다며 무조건 TV를 사야 한다고 주장했다. 딸은 내가 월 3만 원의 추가 용돈을 준다는 말에 혹해서 바로 매수당했고, 아들은 TV로 만화, 아니 솔직히 이야기하면 유튜브를 봐야 한다며 안된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 집 서열 1위인 나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아직 우리 집 TV는 공백 상태다.
퇴근하고 오면 항상 아들은 소파에 누워서 TV로 유튜브 영상을 시청하고 있었는데 그 녀석이 거실에서 사라지니 집에 올 때마다 신기하긴 했다. 그렇다고 숙제를 다 해놓고 그러진 않았다. 나는 저녁을 준비하면서 항상 TV를 켜놓곤 했는데 TV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무료했다. 저녁을 먹고 소파에 앉은 남편은 TV가 없으니 집에 올 맛이 나지 않는다며 하소연했다. 근데 생각해 보면 남편은 야근도 잦고 주말 아니면 TV도 많이 안 보는 편이었다. 없으니까 그냥 더 생각이 나는 모양이었다.
곧 있으면 딸아이 기말시험 기간이고 이번에는 진짜 TV를 없애겠다는 나의 의지는 불타올랐고, 나는 남편에게 LG 스탠바이미를 추천했다. 그 대신 조용히 안방에서 혼자 TV를 보겠다는 조건으로 말이다. 하지만 남편은 그렇게 작은 거는 보고 싶지 않다며 완강히 거부했다. 근데 검색하니 이것도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아무튼 TV 건은 딸의 기말시험이 끝난 이후에 다시 의논하기로 했다.
남편은 일요일 8시만 되면 집을 나간다. 그리고 본인의 사무실로 출근한다. 신인감독 김연경을 본방사수하러. 이건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르겠다. 어제는 다른 프로그램에 밀려서 원래 9시 방송인데 11시 방송 시작이라 그걸 본다고 새벽 1시에 집에 들어왔다. 진짜 고생을 사서 한다.
TV가 고장 난 이후 난 행복한 상상을 했다. 분명 아들은 TV가 고장 났으니 그걸 볼 시간에 책을 읽을 것이다. 나도 이제 TV 없으면 전업 작가처럼 열심히 글을 쓰겠지. 그리고 남편은 여름에 산 <니체 인생수업:니체가 세상에 남긴 66가지 인생지혜> 책을 다 읽겠지. 아니었다. 이 중 아무것도 이루어진 게 없다. 남편은 휴대폰 중독 증상을 보이고 있으며, 나는 그냥 저녁마다 널브러져 있으며, 아들은 하라는 숙제는 안 하고 쇼츠만 열심히 보고 있다.
뭔가 글을 쓸 수 있는 멋진 환경이 조성이 된 듯하나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일단 생각해 보니 10월 황금연휴가 끝나고 학교 일도 많았다. 주말에는 시댁에 감도 따러 갔고, 달리기도 했다. 토요일 오전은 딸아이 디지털드로잉 수업을 태워주고 태워오느라고 다 보냈고, 오후에는 청소며 빨래 일요일에는 다음 주를 위한 충전의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풀충전이 되는 것도 아니니 그게 더 문제였다.
브런치 작가가 되고 너무 행복했다. 구독자가 조금씩 느는 것도 신기했고, 이웃들이 달아주는 댓글에는 따뜻함이 있었다. 소소한 내 일상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때로는 위로가 된다는 생각에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그런데 그 초심을 잃었다.
내가 얼마나 바쁜데. 내가 전업 작가도 아니고. 하루에 출퇴근 시간만 2시간이나 걸리고. 애들 밥도 해야 하고. 주말에는 부모님 댁에 가서 일도 해야 하고. 아이들 병원도 가야 하고. 달리기도 해야 하고. 그리고 이걸로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한 달 가까이 글을 한 줄도 쓰지 않았다. 마음이 무거워 브런치도 자주 안 들어갔다. 남들은 이렇게 열심히 쓰는데 내가 한심하기도 했다.
지난주 우연히 나의 알고리즘에 뜬 한 사람의 영상을 보고 머리를 망치로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었다. 그 영상의 제목은 ‘안전화 신고 매일 하프코스 뛰는 비계공 러너’였다.
https://youtu.be/vYy6QUHVbJo?si=2NxCfmVjpHwnv9l7
29살 청년인 심진석 씨는 러닝화도 아닌 무거운 안전화를 신고 8km를 달려서 출근을 했다. 그리고 비계공으로 8시간을 근무를 하고 또 퇴근길도 달리기를 했다. 쿠션이 좋은 러닝화도 옷도 시계도 없지만 그는 어느 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그냥 행복한 낭만 러너였다. 나라면 발이 아파서 안돼, 어두운 새벽은 위험해서 안돼, 저녁에는 집에 가서 쉬어야지. 그래야 내일 일하지 하며 바로 포기를 했을 것이다. 아니 달리지 않아야 할 이유를 백만 스무 가지는 찾아내었을 것이다.
매일 아침 1등으로 출근해서 교무실에서 커피를 내리며 교무선생님을 기다린다. 그리고 늦게 온 교무선생님에게 왜 이렇게 늦었냐며 타박한다. 그러고는 피곤해서 죽겠다며 이 놈의 학교 언제 때려치우지라는 레퍼토리로 10분간 토크를 한다. 그러면 교무선생님이 이제 2층으로 올라가라며 나를 내쫓는다. (교무샘 죄송해요 T.T)
오늘은 교무선생님이 나보다 더 일찍 출근해 계셨다. 토요일에 출장 잘 다녀왔냐는 인사와 함께 이제는 더 징징거리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다. 왜 갑자기 그러냐고 그러기에 간단히 대답했다. 세상에는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이 많은데 나처럼 징징거리지 않더라고. 그래서 반성이 되더라고 말이다. 이번에는 이 약속을 좀 지켜보련다. 그리고 다시 초심을 찾아서 열심히 글도 써 보련다. 분명 몇 달은 횡설수설하겠지만 다시 내 페이스를 찾아보겠어! 나도 낭만을 찾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