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적인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14년 동안 나를 다독여준 긍정의 힘
어제는 기분이 뭐 같았다. 학교 이야기는 길게 하지 않겠다. 여자아이들 사이에 문제가 있었고 학부모에게 전화가 오고 문자가 오고 그랬다. 학급 학예회를 하루 앞두고 교실 정리에 무대 준비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집에 온 나는 녹초가 되었다. 입맛도 없었다. 냉동실을 뒤져 어묵꼬치를 찾아서 멸치 육수에 어묵과 팽이버섯을 때려 넣고 어묵탕을 끓였다. 입맛이 썼다. 3일간 야근을 하고 정시에 퇴근한 남편도 핼쑥하긴 마찬가지였다.
딸아이는 체육 시간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몇 주간 준비한 티니클링(일명 대나무춤) 예선이 있는 날이었다. 반에서 총 4팀이 무대를 선보였고, 그중 2개 팀이 준결승에 진출한다고 했다. 그리고 기말 시험이 지나고 본선 경기(8팀)에서 1등 팀에게는 무려 상금 10만 원이 주어진다고 했다. 딸아이는 지난주 친구들을 모아서 동네 공원에서 춤 연습을 했더랬다. 서론이 긴 것을 싫어하는 나는 결론부터 물었다. 딸아이는 본선에 진출했다고 했다. 그런데 왜 표정이 그 모양이냐고 물었더니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준결승에 올라갈 2팀은 공정하게 아이들 전체 투표로 정하기로 했고, 선생님은 종이에 1팀을 쓰게 했단다. 종이투표를 하나씩 개봉할 때마다 다른 팀 여자아이가 계속 “00이 팀 이름 안 나왔으면 좋겠다. 00이 팀 이름 쓰지 마.”라고 기분 나쁜 말을 하며 결국 자기 팀이 떨어지자 눈물을 쏟으며 세상에서 제일 억울한 사람처럼 대성통곡을 하더라는 것이다. 딸아이는 몹시 기분이 나빴다고 했다. 본인 팀도 열심히 안무를 창작하고 주말에 시간 쪼개 공원에서 모여 연습까지 했는데 뭔가 손쉽게 준결승에 진출한 취급을 당해 억울했다는 것이다. 딸에게 한마디 해주었다. “세상에 이상한 사람이 많은데 그 사람들을 다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마. 그 친구가 좀 이상하네. 선의의 경쟁에서 이긴 친구 팀을 축하해 주지 못할망정 악담이나 퍼붓고, 울어버리는 행동은 상당히 이기적인 행동이라고 밖에 엄마는 생각이 들지 않아. 네 팀이 열심히 노력해서 올라간 거니까 절대 신경 쓰지 마. 그리고 그 친구의 행동은 본받지 말았으면 해.” 나는 그 친구가 초등학교를 어떻게 보냈고, 부모님에게 어떤 교육을 받으며 자랐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다른 날 같았으면 남편에게 학교에서 힘들었던 이야기를 털어놓았을 텐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말할 기운도 없었다. 그리고 좋은 이야기도 아닌데 남편에게 마음의 짐을 나누어 주고 싶지 않았다. 남편도 나도 빨리 쉬고 싶었을 따름이다. 내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딸아이의 교복 셔츠를 빨아야 함을 알았고 남편에게 부탁을 했다. “여보, 내가 설거지하고 당신 먹을 단감 깎아 줄 테니까, 교복 셔츠 좀 빨아서 널어줄 수 있어?”
“나 발톱 깎고 있잖아. 조금 있다 할게.”
“시간이 늦었어. 지금 빨리 빨아 널지 않으면 내일 다 안 말라. (우리 집은 교복 셔츠 자연 건조 시킴)”
“발톱만 다 깎고 할게.”
“급하고 중요한 일 먼저 해줘.”
“나 지금 발톱 깎고 있는 거 안 보여? 발톱 깎다가 버려두고 셔츠 빨러 가라고?”
내 기준에 지금 제일 급한 일은 설거지도 발톱도 아닌 아이의 교복 셔츠였다. 나는 설거지를 중단하고 셔츠를 빨러 욕실로 갔다. 기분이 몹시 불쾌했다. 그리고 단감과 배를 깎아서 딸아이에게만 주었다. 분노의 양치질을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밤새 뒤척였다. 내일 학교 가서 아이들을 어떻게 지도를 해야 할까? 저 엄마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저러시는 걸까? 남편한테 너무했나? 남편도 힘들었을 텐데.
퇴근하고 저녁을 먹고 잠깐 유튜브로 인간극장을 봤다. 이번 주 내용은 소방관 남편과 시력을 잃어가는 아내의 이야기였다. 그들 부부에게는 3명의 남자아이가 있었다. 임신을 하면 시력이 더 나빠진다는데 둘째(쌍둥이)를 포기할 수 없었던 아내의 이야기부터 부부의 사랑스러운 일상까지 웬만한 드라마보다 더 감동적이었다. 놀라운 건 시부모님이었다. 아들이 며느리가 시력에 문제가 있다고 말했는데 ‘네가 사랑하는 여자라면 알아서 하라’고 결혼을 허락했다는 것이었다. 그중에서 내가 인상적으로 본 건 소방관 남편이었다. 마동석 능가하는 몸짱인 남편은 육아도 엄청 잘 도와주고 아내에게도 상당히 살가운 남자였다. 그리고 내 판단에 남편은 감정 기복이 크지 않은 사람이었다. 분명 아내가 시력을 잃어가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분명 부부 싸움도 했을 것이다. 그래도 분명 쓰러지려는 아내를 일으켜 세운 건 아이들뿐만 아니라 남편이 큰 몫을 했을 거라 생각이 든다. 아이들 3명을 돌보면서도 시력을 잃어가는 아내까지 돌봐야 하는 남편이지만 불평하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소리 지르거나 화내지 않았다. 뭐든 부부가 함께 하려고 노력했다.
이효리가 TV에서 남편 이상순과 결혼을 한 이유를 물었을 때 자기는 감정 곡선이 아주 널을 뛰는데 이상순은 감정 기복이 심하지 않아서라고 했다. 자기가 오르락내리락하는 사이 중간 지점에서 항상 만나게 되더라는 것이었다. 그랬다. 그래서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거라고.
결혼 14년 차, 내가 요즘 남편과 결혼을 잘했다고 생각을 한 번씩 하는데 그게 바로 우리 남편도 크게 감정 기복이 없는 사람이라서 그렇다.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남편은 부정적인 감정에서 빨리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나처럼 부정적인 감정에 휩쓸려서 크게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사람이다. 저경력 교사 시절 나는 걱정이 너무 많은 사람이었다. 교실에서 아이들 문제가 생기거나 학부모에게 민원 전화가 오면 불안해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을 정도로 극도로 예민한 사람이었다. 그때마다 남편은 ‘네 잘못이 아니야, 괜찮아. 다 지나간다.’라며 나를 다독여주었다. 초창기에는 별로 약발이 없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런데 남편은 매사에 긍정적인 사람이었고, 나에게도 긍정의 에너지를 전파한 덕분에 요즘은 반에 문제가 생겨도 그럭저럭 잠도 자고 밥도 먹는다. 딸아이가 학교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뭔가 어른 같은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것도 다 남편에게 배운 것이다.
남편은 아침에 나에게 사과를 해주었다. 내가 뭐 잘못한 거 없어라고 물었더니, 어제 일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AI처럼 또박또박 자신의 잘못을 읊어주었다. 그런데 지금 글을 쓰면서 생각해 보니 남편이 크게 잘못한 것도 없다. 그 발톱 깎고 다듬는 데 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새벽에 먼 길 떠나는 내 생각해서 남편은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꺼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말이다. 내 이상형 고수랑 하나도 닮지 않았고, 폴킴처럼 목소리도 감미롭지 못하고, 책도 안 읽는 남편이지만, 항상 그 자리에서 변함없이 나를 지켜주는 남편이 참 고마운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