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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 난 TV가 폭로하는 ‘사차원’ 가족의 은밀한 일상

꺼져버린 화면 뒤, 차마 말하지 못했던 4인 가족 TV의 마지막 기록

by 사차원 그녀

안녕하십니까? 저는 4년 6개월간 사차원그녀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냈던 TV입니다. 저는 오늘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다른 곳으로 떠납니다. 오후에 새로운 TV 녀석이 저의 빈자리를 채우러 올 겁니다. 저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10월 말 고장이 났습니다. 기사님이 다녀가시고, 짠순이인 사차원그녀는 저를 서비스센터에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달 넘게 저를 방치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새로운 TV 구매에 반대하며, 흥선대원군처럼 강경한 목소리를 내던 그녀가 갈수록 남편의 기세에 밀리는 형세였습니다. 그래도 저는 그녀가 이길 거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졌습니다. 중1인 딸의 기말시험이 끝난 지난 주말 그녀는 인터넷으로 TV를 주문하고야 말았습니다.


이렇게 떠나는 길에 저는 4년 6개월간 그녀의 집에서 관찰한 가족 이야기를 폭로하고자 합니다. 뭐 사회적으로 큰 파장이 일어나진 않겠지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에 나오는 그 모자장수의 심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절대 소문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음음.


먼저, 이 집의 가장인 사차원그녀의 남편도 그녀 못지않게 이상한 점이 많습니다. 일단, 제가 고장 난 이후에 TV를 보겠다고 일요일 저녁 8시만 되면 사무실로 출근해 11시쯤에야 집에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리고 이 분은 평균인보다 눈치가 10% 정도 부족합니다. 저녁을 항상 아내가 차려 놓고, 마지막으로 식사를 하는 사람은 남편이었습니다. 원래 마지막에 먹은 사람이 식탁 정리하는 거 아닙니까? 이 분은 눈치도 없이 소파에 기대앉아서 과일을 요구합니다. 몇 번 이러다가 된통 혼이 난 그는 요즘은 그릇을 설거지통에 가져다 놓고 반찬통도 냉장고에 잘 넣는답니다.


아, 그리고 며칠 전에 이들 부부가 대화하는 내용을 들었는데 기가 차서 제가 그대로 읊어보겠습니다. 둘 다 개그감이 상당한 것 같습니다.

아내: 여보, 오늘 내가 유튜브 봤거든, 그 집은 난방 온도를 22도로 맞춰놨더라고. 안방 25도는 진짜 오버인 거 같아. 이제 24.5도로 세팅한 그 온도에서 더 올리지 마라.

남편: 또 이상한 거 보고 이상한 말하네. 내가 그런 영상 보지 말라고 했지. 그 집하고 우리 집은 달라. 그리고 감기 걸려서 병원 가면 돈 더 많이 들어. 추울 때는 뜨뜻하게 자야지.

아내: 근데 25도는 진짜 오버인 것 같아. 25도 맞추려면 밤새 보일러 돌아간다. 지금 가스비도 올라서 장난 아니야. 우리 집 난방 온도가 다른 집보다 높은 건 확실하다.

남편: 그 집은 우리 집하고 다르다니까. 계속 영상 1개 봤다고 그게 진실인 것처럼 이야기하면 안 되지. 당신은 그게 문제야. 영상을 너무 맹신해.

아내: 맞아, 그래 그 집은 온수 매트 쓰고, 가습기를 틀긴 하더라. 우리 집은 전기장판도 안 쓰긴 해.

남편: 봐라. 전기장판도 없이 22도는 안 돼. 그리고 나 허리 아파서 뜨끈하게 지져야 해.

아내: 침대는 열이 바로 안 오잖아. 그럼 나랑 바꾸자. 당신이 거실 모서리에 토퍼 깔고 자. 거기 안방이랑 oo(아들) 방 난방 다 지나가는 곳이라서 엄청 따뜻해. 그리고 내가 추우면 이불 더 덮으라고 했지?

남편: 이불이 없는데 어떻게? 이불이나 사주라. TV 오면 내가 거실에서 잔다. 빨리 TV나 사라.

아내: 아무튼 보일러 온도 더 올리면 이혼한다. 명심해라.

다른 집은 안 가봐서 다른 부부들은 어떤 정상적인 대화를 나누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대화는 아닐 듯합니다.

다음으로 이 집 둘째인 아들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일단 제가 고장 나고 나서 가장 슬퍼했던 사람은 아들이었습니다. 학원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아드님은 항상 저를 반겨주었습니다. 화면을 켜고 30분가량 만화를 보고 난 뒤, 유튜브를 검색해서 30분 정도 게임 영상을 보며 힐링을 하곤 했습니다. 6시가 조금 넘으면 그가 가장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엄마, 즉 사차원 그녀에게 전화가 옵니다.

“아들, 뭐 해? 엄마 다 와가. 숙제하고 있어. 뚝뚝뚝.”

10분 후 집에 들어온 그녀는 아들의 이름을 외칩니다. 소파에 두고 간 뒤집어진 양말, 과자 봉지와 요구르트 껍질까지 그는 오늘도 엄마의 맴매를 피하지 못했습니다. 그 아들도 아빠를 닮아 눈치가 다소 부족합니다. 이 집 아들은 휴대폰 사용 시간제한이 있지만 그녀의 눈을 피해 몰래몰래 쇼츠를 봅니다. 그래서 웬만한 유행하는 영상과 춤을 다 알고 있습니다. 가끔 그 노래를 틀어놓고 제 앞에서 춤을 추기도 했는데, 그에게 날아온 것은 쿠션과 잔소리였습니다. 엄마를 기쁘게 하려는 노력은 가상했지만, 그녀는 이런 거에 넘어갈 만큼 순수하지 못했습니다.


세 번째, 이 집의 서열 1위인 딸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드리죠? 아, 왜 사차원 그녀가 이 집 서열 1위가 아니냐고요? 그것은 바로 사차원 그녀도 학부모이기 때문이죠. 딸아이 시험을 위해서라면 뭐든 하는 그녀이니까요. 샤워를 30분이나 하고 방으로 들어간 딸은 공부를 합니다. 하는 거겠죠? 그래요. 일단 믿어주죠. 그리고 문밖에서 엄마는 각종 과일을 예쁘게 깎아서 굽신거립니다. 똑똑똑 과일 왔습니다.

“집중해서 빨리해. 딸. 기말시험은 더 잘할 수 있지?”

아오~ 이러니 매일 아들이 누나만 편애한다고 하는군요. 그래서 이 집 딸이 기말 시험을 잘 봤냐고요. 묻지 마세요. 다칩니다. 이 딸은 눈물이 많은가 봅니다. 남들은 1년에 3번 울기도 힘든데 그저께는 하루에 3번을 울었다고 합니다. 학교에서 도덕 시간에 본 영상이 너무 슬퍼서 1차로 울었다고 합니다. 1년간 함께 한 영어학원 선생님이 다른 곳으로 옮긴다는 소식을 듣고 펑펑 울었고요. 집에서는 노래 들으면서 가사에 감동해서 마지막으로 또 울었죠. 저녁밥을 먹으면서 이 이야기를 들은 엄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습니다. 이 집 모녀는 정말 성향이 반대입니다.


마지막으로, 사차원그녀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녀는 매번 저를 째려보며 노트북으로 글을 씁니다. 근데 글을 쓰는 시간보다 수업 준비하고 학교 업무 하는 시간이 더 많기는 합니다. 그녀는 밤낮으로 체중계에 올라가 몸무게를 잽니다. 그리고는 "하, 살 언제 빼지?"라며 거의 1년째 같은 말을 반복합니다. 그리고는 스스로 위안을 삼지요. 달리기 해서 근육량이 늘었어. 지방이 는 건 분명 아니야.


그녀도 4년간 저를 무지 아꼈습니다. 아침 6시 알림이 울리자마자 저를 켜서 뉴스를 틀곤 했죠. 그리고 저녁에는 생생정보와 또 8시 뉴스를 보곤 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기혼 여성인 그녀는 왜 ‘나 혼자 산다’, ‘나는 솔로’, ‘결혼 지옥’ 이런 프로그램을 즐겨봤을까요? 그녀는 왜 항상 혼자인 사람들을 부러워했을까요? 4년째 장거리 출퇴근 중인 그녀가 내년에는 학교를 옮겨 집 근처로 온다고 합니다. 매일 그녀와 함께 일어나고 함께 잠을 잤던 저이기에 가슴이 뭉클합니다. 앞으로는 그녀가 혼자인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않고 가족들과 더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4년 6개월이란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 가족의 소중한 일상을 엿볼 수 있어서 참 행복했습니다. 제가 가는 곳이 어디인지 예상이 되지 않지만 저도 그곳에서 행복할 수 있겠죠? 이상 저의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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