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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는 현대판 흥선대원군이 산다.

아들의 망언, 뒷목 잡는 엄마

by 사차원 그녀

12월 초의 일이었다. 이제 곧 중학생이 되는 아들의 영어 학습이 걱정되던 차에, 결국 딸이 다니는 영어학원에 전화를 걸었다. 학원에서는 레벨 테스트 겸 수업 청강을 한 번 오라고 권했다. 테스트 당일, 학원을 다녀온 아들은 제법 으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내심 안도했다. ‘그래, 그동안 영어 학원 보낸 보람이 있구나!’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학원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네, 선생님.”

“어머니, 오늘 oo이가 테스트도 받고 수업도 잘 듣고 갔어요. 그런데...”

“말씀하세요, 선생님. 시험 점수가 어떻게 나왔을까요?”

“아... 어머니, 저희 기대보다 점수가 많이 낮게 나왔어요. 100점 만점에 19점이더라고요.”

“아하하, 그래요? 수준이 많이 낮네요.”

“oo이가 오늘 들은 수업은 C반 수업이었는데, 본인은 더 높은 반에 가서 수업을 듣고 싶다고 선생님께 말했대요. 그런데 어머니...”

“아니에요, 선생님. 그냥 C반으로 등록할게요!”

“네, 제 생각에도 C반에서 기초를 닦으며 올라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니 쪽팔리고 분했다. 19점이라니. 1년간 학원비로 300만 원 가까이 썼는데 고작 19점이라니! 화가 치밀어 아들을 불렀더니, 녀석은 속도 없이 싱글벙글 웃으며 이상한 춤까지 추며 나타났다.

“아들, 이리 와봐.”

“왜?”

“오늘 영어학원 가서 문제 똑바로 푼 거 맞아?”

“응! 그리고 수업 내용도 내가 다 아는 거였어.”

“19점. 100점 만점에 19점이야. 지금 장난해? 그러면서 B반 수업을 듣고 싶다고 했다니 기가 찬다, 정말.”

“뭐, 그게 어때서?”

“양심 좀 있어라. 엄마가 1년 동안 학원 보내줬더니 그동안 놀기만 한 거야?”

“아니야, 이게 다 엄마 때문이라고!”

“뭐라고? 너 제정신이니?”

“내 친구들은 기본 3년 이상 학원을 다녔는데, 엄마가 늦게 보내줬잖아! 난 작년 12월부터 다녔는데 어떻게 벌써 영어를 잘해? 나도 일찍 시작했으면 더 잘했을 거야!”


결국 지금 다니는 학원은 12월까지만 다니고, 내년 1월부터 새 학원에 가기로 했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미리 예습이라도 시킬 겸 학원에 교재 목록을 요청해 문제집을 샀다. 우선 단어부터 외우게 했는데, 하루 25개 남짓한 분량을 일주일에 고작 3번 외우는 것도 힘들어했다. 어제는 회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아들에게 단어 시험공부를 해놓으라며 엄포를 놓았다.


집에 도착해 샤워를 마친 뒤 아들을 불러 앉혔다.

“자, 딱 10개 부른다. 다 못 맞히면 내일 게임은 없어.”

“1번, 캐릭터(Character).”

“캐릭터? 어... 게임 캐릭터?”

“넘어간다. 2번, 아니스트(Honest), 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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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가져와 봐. 채점하게.”

“두 개 못 썼어.”

“그럼 내일 게임은 없는 줄 알아. 방에 가서 ‘character’랑 ‘honest’ 10번씩 써와.”

그러자 아들이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엄마 발음이 이상해서 틀린 거야!”

“뭐라고? 나 정확하게 읽었어.”

“나는 미국식 영어에 익숙한데, 엄마가 영국식 발음으로 읽으니까 이상하게 들리지! 나 엄마랑은 영어 공부 못 하겠어!”

“...... 당장 들어가!”


누가 뱀띠 아니랄까 봐, 뺀질거리며 요리조리 빠져나갈 구멍만 찾는 아들. 도대체 공부는 언제 시작할는지 엄마의 시름만 깊어간다. 외국 문물을 이토록 거부하니, 우리 집에는 흥선대원군보다 더한 '현대판 흥선대원군'이 사는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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