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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차원 그녀 Mar 22. 2024

큰 산을 한번 넘어 보겠습니다.

한 박자 쉬고 두 박자 마저 쉬고 하나 둘 셋

작년에 이어 올해도 5학년 담임입니다. 작년보다 학급의 학생 수도 적고 성비도 거의 반반이라서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올해부터 우리 학교도 학교종이 앱을 사용하기로 하였습니다. 종이 안내장을 더는 발송하지 않아도 된다는 희소식에 저는 만세를 외쳤습니다.      


다른 분들은 모르겠지만 담임하면서 스트레스받는 일 중 하나가 안내장 회수입니다. 안내장 회수에 짧으면 3일 길게는 1주일 정도 소요됩니다. (학부모 협조가 잘 되는 학교는 훨씬 짧겠지만요) 아무튼 학부모 동의서는 2월에 다 받아둔 상태이고, 3월 첫 주부터 단체 문자로 학급 링크 주소가 전송되었습니다. 곧 가입이 완료되면 저는 종이 안내장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목요일쯤 교무행정원님이 업무 메신저로 미가입된 아동을 확인하라는 메시지가 날아왔는데 글쎄 우리 반은 19명 중의 3명이나 가입을 안 했군요. 3월이라 부모님들도 바쁘실 테니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리고 목요일 퇴근길에 친절하게 학교종이 앱 설치를 부탁드린다는 말씀과 학급 초대 링크를 다시 문자로 보내드립니다. 금요일 아침에 와보니 2분이 가입을 완료하셨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1명 남았습니다. P군에게 수업을 마치고는 잠깐 남게 했습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대한민국 교사는 이런 거로 화내지 않습니다.      


“선생님 우리 엄마 필리핀 사람이라서 한국말 잘 못해요.”

“이거 어려운 거 아니야. 학교종이 앱 플레이스토어에 들어가 다운로드하고, 선생님이 보낸 링크 클릭하면 돼. 저녁에 엄마 퇴근해 오시면 같이 해보세요.”     


그리고 혹시 몰라 퇴근길에 어머니께 영어로 장문의 문자도 보내드렸습니다. 뭔가 우리말로 설명한 게 어려워서 이해를 못 하셨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거든요. 영어 작문은 파파고 번역기 도움을 받았습니다. 어머니께서 제가 영어를 잘한다고 오해하시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토요일 아침 몸살감기로 병원에 가 대기하고 있는데 어머니께 전화가 왔습니다. 용건은 본인이 학교종이 앱을 설치했는데 로그인이 안 된다는 거였습니다. 비밀번호를 아무리 입력해도 안 된답니다. 아! 회원가입을 못 하셨구나! 저의 부족한 설명에 로그인 화면만 뚫어지게 쳐다보며 왜 안 되지? 걱정하셨을 어머니 생각에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수액을 맞고 11시쯤 집에 온 저는 남편 명의로 학교종이 회원가입을 하면서 단계별로 화면 캡처를 했습니다. 그리고 또 난간이 있는데 비밀번호 설정입니다. 이게 조건이 특수기호나 영어 숫자를 섞어서 만들어야 합니다. 이걸 또 설명하자니 귀찮아서 그냥 쉽게 캡처 화면에 ac1234라고 적었죠. 마지막 단계까지 화면을 다 캡처하고 붉은 펜으로 표시도 합니다. 어머니 카톡으로 순서대로 사진 5장을 보내드립니다. 저녁에 천천히 해보시라고 말씀도 전합니다.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입니다. 아이가 싱글벙글 웃으며 들어옵니다. 

“선생님, 엄마가 학교종이 가입했어요.”

“오호, 그래 잘했다.”

어머니의 끈기와 저의 고군분투 끝에 학교종이 가입을 완료하였습니다.      


P군의 어머니께서는 평일에 영어 학원에 수업을 가신다고 합니다. 

엄마 자랑에 P군의 어깨가 한껏 올라갑니다. 저는 웃으면서 팩트를 살며시 날려줍니다. 

“P야, 선생님도 알아. 우리 P도 집에서 엄마랑 영어 공부 좀 하는 게 어때?”

“엄마가 알려주는데, 제가 귀찮아서 안 해요.”     


이 녀석 이걸 자랑이라고 하는 거니? 영어 조금 못해도 우리 P군은 마음 씀씀이가 참 예쁩니다. 개학 첫날 종이에 손가락을 베인 저를 위해 보건실로 달려가 반창고를 2개나 가져다주었고요. 그리고 자기 자리 옆에 휴대전화 보관 케이스가 있는데 하교 시간에 친구들 폰을 꺼내주고 싶어서 난리입니다. 정작 본인은 폰이 없으면서요. 숙제는 한 번도 제때 제출하는 날이 없지만 그래도 항상 싱글벙글이라서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만난 지 며칠 안 된 선생님께 사랑 고백을 하는 박력 넘치는 학생이랍니다.      


*학교종이는 학교 행정업무와 학부모 간의 소통을 지원하는 앱으로 가정통신문을 비롯하여 결석계, 상담 신청 등의 기능을 제공하는 학급 경영 도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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