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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차원 그녀 Mar 24. 2024

반장의 품격

넌 어느 별에서 왔니?

여학생들이 말이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대단한 오해다. 내가 맡은 반에서 대표 수다왕은 대부분 남자아이였다. J군은 말이 많다는 꼬리표를 달고 올라왔다. 말 많은 학생을 싫어하는 담임에게는 경계 대상 1호다. 나는 특히 오디오가 물리는 것을 싫어하는데, 십중팔구 이런 학생은 내가 말하는 중간에 끼어들어서 말을 끊어 먹을 확률이 상당히 높다. 하지만 가끔 나의 예상을 빗나가기도 하는데.     


개학 첫 주. 아이들과 새로운 담임은 아직은 어색하다. 아이들 스스로 규칙도 4가지 정해보고 담임인 나는 요일별 루틴을 만들기 위해 바쁜 1주를 보냈다. 나의 우려와 달리 세상 차분한 모습을 보여준 J군. 아침 활동 시간에는 고고하게 독서를 즐기기까지 했다. 일제강점기 역사책이었는데 정확한 제목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역시 5학년 올라오더니 철이 들었구먼.     


3월 2주 차. 이번 주에는 민주주의의 꽃 투표가 있는 날이다. 1학기 학급 봉사위원을 뽑는 날이다. 초등학생이 선거에 무슨 대단한 공약이 있겠냐마는 그래도 담임은 욕심을 부려본다. 선거 나갈 사람은 집에서 발표할 말을 준비해 오라고 단단히 일렀다. 당일 19명의 아이 중 6명의 아이가 출마했다. J군은 뭔가 갈팡질팡하는 표정을 짓더니 결국 출마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고 칠판에 6명의 후보 이름이 적혔다. 여학생들은 네모나게 접어온 종이, 수첩을 넘겨 가며 자신의 공약을 발표한다. 이거나 저거나 별 차이가 없긴 하다. 마지막으로 J군의 차례이다.      


“제가 작년 4학년 1학기에도 반장으로 당선이 되었습니다. 그때는 제가 어떻게 하는지 잘 몰라 반장을 말아먹었습니다. 올해 제가 반장이 된다면 제 이름 3글자를 걸고 최선을 다해 여러분을 위해 봉사하겠습니다.”  

   

아이들은 J군의 솔직한 자기 고백에 크게 감동했는지 표를 많이 준 모양이었다. J군은 또다시 반장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게 되었다. 요즘 반장이라고 해봤자 엄석대처럼 권력이 있거나 아이들에게 부러움의 대상도 아니다. 우리 반장은 선생님의 잔심부름과 하교 인사 당번 정도를 하게 될 것이다.     


3월 3주 차. 이제 반 아이들 이름도 다 외웠고, 건강 상태나 특이 사항도 어느 정도 파악을 한 상태다. 이번 주는 진단평가가 있었다. 아! 역시 교사의 촉이란! 수업 시간에 멍 때리고 딴짓하던 아이들은 대부분 미도달 상태이다. 담임은 어떻게 이 아이들을 부진의 늪에서 구출할지 머리가 아프다. 시험을 5교시 동안이나 친 아이들을 위해 작은 이벤트로 텔레파시 게임을 했다. 두 가지 선택지 중 선생님이 더 좋아할 만한 것을 고르면 되고, 가장 많이 선생님과 텔레파시가 통한 사람에게는 사탕을 주기로 했다. 첫 번째 판에서 7명의 아이가 사탕을 받을 기회를 얻었다. 너무 아쉬워해서 2번째 판도 준비한다. 선택이 끝났고 담임은 답을 부른다.   

   

“자 꽃과 나무 중 선생님의 선택은? 바로바로 나무”

“아! 아쉽다. 이때까지 다 맞췄는데 여기서 틀리다니........”


갑자기 J군이 한마디 한다. 

“저는 선생님이 꽃과 같이 예쁘셔서 당연히 꽃을 고르실 줄 알았어요.”

이 멘트를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아 맞다. 우리 남편. 영혼 제로 닭살 유발 더불어 듣는 이의 손발을 오그라들게 만든다는 전설의 그 멘트, 도대체 열두 살밖에 안 된 이 녀석은 이런 걸 어디서 배운 거지? 정색하고 뭐라고 하면 울까 봐, 웃으면서 한마디 해준다. 

“J야, 이런 말을 너에게 듣게 될 줄이야. 하하하. 하지만 선생님은 이런 말 별로 안 좋아해.”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리고 솔직히 이야기하면 그날 연구실에 가서 자랑했다. 남편은 입에 발린 소리 선수라 이런 말을 할 때 정말 한 대 때려주고 싶다고 생각하는데, 얘는 귀여워서 뭐라 할 수가 없다.  

    

텔레파시 게임을 2판이나 했고 대부분의 아이가 사탕을 받았다. 그런데 4명의 아이는 빈손이다. 뭐라도 명분을 만들어야 하니 담임은 본인보다 키 큰 남학생에게 질문을 던진다. 

“게임은 끝났고 4명의 친구가 사탕을 못 받았단다. 엄청나게 부러워하는 표정을 하고 있는데 너는 선생님이 저 친구들에게 사탕을 주는 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게임은 게임이라서 못 먹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근데 친구들 모두 열심히 게임에 참여했으니 기분 좋게 같이 먹으면 어떨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하하”     


이런, 이 녀석 T냐? 작전 실패다. 이제 남은 마지막 카드 반장을 부른다. 

“반장, 저 어린 영혼의 슬픈 눈빛을 봐봐. 선생님이 줘야겠지?”

“아, 고민이 되는데 어떻게 하죠?”

“자, 마지막이다. 잘 들어. 오늘 5교시 동안 시험을 친다고 엄청 머리를 썼어. 지금 몹시 당이 떨어진 상태야. 지금 사탕 못 먹으면 집에 가는 길에 픽 쓰러질지도 몰라.”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의도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사탕을 꼭 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반장 훌륭하구나. 4명도 나와 사탕 받게 줄을 서시오.” 


다음 주에는 학부모 초청 공개수업이 있습니다. 불행한 소식은 J군이 딱 그날에 교외 체험학습을 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아이들이 긴장도 안 하고 공개수업에서 말도 잘하는데 담임은 상당히 아쉽습니다. 그날 주제가 친구 장점 찾아 칭찬하기인데 우리 J군이 어떤 달콤한 말로 친구들의 마음을 훔칠지 궁금한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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