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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차원 그녀 Mar 26. 2024

있을 때 잘해 후회하지 말고

제발 쫌! 

작년 우리 반 아이들은 2월 종업식까지 사람 피를 말렸다. 여학생들의 갈등을 풀기 위해 방과 후에 상담한다고 진을 다 뺐다. 분명히 단축 수업 기간인데 더 피곤했다. 종업식까지 D-2. 아이들은 선생님의 향후 거치가 궁금하다. 

“선생님, 혹시 우리 따라 6학년 오는 거 아니죠?”

“그럴 가능성은 0이야.”

진심으로 이 아이들과 빨리 헤어지고 싶었던 담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절대 오지 마세요. 6학년”

“걱정하지 마셔. 가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다.”     


다행히 모두의 바람대로 나는 그들의 담임이 아닌 5학년 담임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 학교 본관 건물은 2층으로, 4~6학년이 2층 한 공간을 같이 쓰고 있으니 이 아이들과 지나치게 자주 마주치고 있다. 그러면서 시도 때도 없이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하는 바람에 부담스럽다.      


8시 전에 출근했다. 1호 차 학교 버스를 타고 일찍 등교한 6학년 언니들이 또 복도에서 시끄럽게 날 부른다. 

“미스터 송! 헬로우! 선생님 사랑해요.”

“제발, 나는 남자가 아니야. 미세스 송이라고 몇 번 말해.”

“오, 미세스 송. 뷰티풀, 엘레강스. 나 다음 주에 프러포즈할 거예요. 메리 미.”

“계속 콩글리시 남발할래? 영어 똑바로 안 배울 거야. 영어 열심히 배워서 유창하게 말할 때까지 제발 날 찾지 말아 줄래?”

연구실에 들어간 나는 커피를 한 잔 내리며 마음의 평안을 찾는다. 아이고 지겨워. 5학년 때는 그렇게 냉랭하더니 이제 와서 뭔 일이래.     


쉬는 시간에 작년 우리 반 여자 애가 우리 교실에 찾아왔다. 노크하고 앞문을 열더니 흥분한 목소리로 자기의 진단평가 점수를 알려준다. 

“선생님 저 국어 100점, 수학 100점, 사회 100점, 과학 96점, 영어 100점. 완전 환상적인 점수죠?”

“오구 오구 잘했네. 이게 다 누구 덕분이야? 그때 너희가 2월까지 선생님 사회 진도 나간다고 짜증 냈어 안 냈어? 응 그래도 선생님 끝까지 한국전쟁까지 진도 나갔다. 이제 이 선생님의 깊은 뜻을 알겠니?”

“그쵸 그쵸, 선생님 생유 베리 감사요”     


오늘 아침 복도에서 또 그녀들을 만났다. 잘됐다. 한 녀석을 데리고 1층으로 내려간다.

“선생님, 저하고 어디 가는 거예요?”

“응, 저기 저기, 너하고 갈 때가 있어.”

1층 현관에 있는 학습 준비물 박스를 옮기기 위해 사람이 필요했다. 학교 건물이 2층이라 엘리베이터가 없는 게 크나 큰 흠이다. 

“자, 네가 그쪽 들고, 이쪽은 선생님이 들게.”

“아. 네^^”

몇 초 만에 또 시끄러운 언니들이 따라와서는 한마디 거든다.

“선생님, 힘도 없는 00 이를 시키고 그래요. 제가 들게요.”

박스를 다른 두 녀석이 번쩍 들어서 옮겨주고 갔다. 뼈 있는 한마디를 남기고.

“이런 거는 꼭 우리 시키더라. 다음부터 선생님 반 애들 시키세요.” 

“우리 반 애들 다들 약해.”

“뭐가요? 최 00이 힘세요. 저보다 더 세요.”

“걔 꼬리뼈 골절이라서 힘쓰면 안 돼.”

“흥칫뿡”      


우리가 썸타는 연인도 아닌데 흥칫뿡이라니요. 왜 항상 우리반 아이들은 저를 떠나면 저의 진가를 알게 되는 걸까요? 한 번도 아이들에게 진심으로 대하지 않은 해가 없었는데 말이죠. 그렇게 속 썩이던 녀석들이 이제와 사랑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거 씁쓸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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