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티라 쓰고 사랑이라 읽는다.
담임을 맡게 되면 학급운영비(학급자치비)를 쓸 수 있다. 대략 금액은 20~30만원 가량이다. 작으면 작은 것 같지만 생각보다 쏠쏠한 금액이다. 학급 운영에 필요한 물품 어느 것도 구매가 가능하다. 주로 나는 학급 단체티와 크리스마스 선물 구입용으로 쓴다.
우리 집에는 3종류의 반티가 있다.
첫 번째로 2022년 3학년을 하면서 아이들과 맞춘 멋쟁이 티셔츠이다. 디자인도 색깔도 내 마음대로 정한 듯싶다. 3학년은 선생님이 마음대로 해도 불평불만이 적다. 이때는 학급운영비로 산 게 아니라, 학예회 의상비로 구입했다. 그때 한창 초록에 꽂혀 있던 나는 옆 반 선생님이 노랑을 사신다는 말씀을 듣고 우리는 더 푸르고 싱싱한 느낌으로 초록을 샀다. 늦가을이었지만 긴 팔을 사기에는 돈이 모자랐고 아이들은 흰 티를 안에 받쳐 입고 학예회 무대에 올랐다. 그날 아이들은 무대에 올라 단체로 리코더를 불었고, 큰 박수를 받았다. 진짜 멋쟁이처럼 빛이 나는 하루였다. 이 옷을 볼 때마다 아이들과 음악 시간마다 복도에 서서 리코더를 불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우리 반 제일 말썽꾸러기 J군이 6개월 만에 작은 별을 완성해 나에게 큰 감동을 주었던 그날이 떠오른다.
다음으로는 작년에 구입한 Forever 52 티셔츠이다. 작년에는 아이들의 의견을 다소 반영하였다. 디자인은 아이들이 고른 것 같고, 색깔은 무채색 빼고라는 나의 조건에 가장 많은 아이들이 고른 게 하늘색이었다. 이 옷을 입고 아이들과 봄 소풍도 가고, 체육대회도 하고, 수련회도 다녀왔다. 처음에는 조금 더 쨍한 하늘색이었는데 갈수록 물이 빠져서 점점 연해졌다. 아이들이 얼마나 우리 반 단체 티를 사랑했는지, 여름이 다 갈 때까지 하루도 교실에서 하늘색 티를 보지 않은 날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이번 주 화요일에 도착한 올해의 티셔츠, Let’s go 02 티셔츠다. 이번 디자인은 내가 정했고, 색깔은 아이들이 정했다. Let’s go 문구는 우리 반 남자아이가 입에 달고 사는 유행어 같은 말인데, 이 티셔츠를 보자마자 이 녀석 널 사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딱 들었다. 02는 2반이라는 뜻이다. 색깔은 소수의 핫핑크 족이 있었으나 시크한 5학년은 검정을 원했다. 아이들의 사이즈를 조사하고 주문한 지 1주일 만에 옷이 도착했다. 우리 반 아이들의 신체 발달 상황이 모두 다르기에 사이즈는 16호부터 2XL까지 골고루 구입했다. 구매 사이트에 기성품보다 사이즈가 약간 작다는 설명이 있어서 혹시 몰라 여유분도 3개 가량 구입했다. 그중 1개는 내가 입고 2개는 2학기 전입생을 위한 나의 마음이다.(안 올지도 모름.) 단체 티가 도착한 날 아이들은 화장실로 달려가 옷을 입어 본다고 난리다. 2XL를 선택한 2명의 남학생이 가장 걱정이었으나 한 명은 헐렁했고, 한 명은 그냥 볼 만했다.
그중 한 명은 바로 P 군이다. 센스 없는 얘가 살 빼라는 말을 P군에게 했지만 우리의 P군은 이런 걸로 화를 내지 않는다. 그래도 선생인 나는 조금 더 고급스럽게 P에게 부탁한다.
“선생님, 옷이 조금 작은 거 같은데요?”
“P야, 선생님 보기는 딱이다. 이 옷 2학기까지 입을 수 있도록 네 몸을 옷에 맞춰 주길 바라.”
“네, 선생님.”
이 옷이 작아지지 않게 제가 2학기에도 우리 P군을 잘 지도하겠습니다.
어제 학교에서 배구할 때 반티를 입고 갔다가 그 복장 그대로 퇴근을 했다. 집에 온 남편이 한마디 한다.
“그 후줄근한 옷은 또 어디서 났노?”
“뭐래. 이거 우리 반 단체 티거든.”
“ㅋㅋㅋ얼마짜리고?”
“20수 면티 8900원쯤. 비웃지 마라. 당신이 마트에서 사 온 13000원짜리 나이키 짝퉁 티셔츠는 한 번 입고 옆 솔기가 터졌지만, 이 티셔츠는 이렇게 양팔을 위로 쳐들어도 뜯어지지 않아. 천년만년 입을 거야”
옆에 있던 아들이 한마디 합니다.
“오예~ 내 잠옷 또 한 벌 늘었다.”
맞습니다. 우리 반 단체티는 해가 지나면 아들의 잠옷이 됩니다. 낡아서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입혀보겠습니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했던 추억도 오래오래 기억하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