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치지 않고 복잡한 인간사를 바라보기
복잡한 인간사를 다루는 건 꼬여버린 실타래를 푸는 일과 비슷하다.
인내심을 가지고 그 원인을 추적하지 않으면 누구라도 금세 지쳐서 나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누구나 꼬여버린 실 뭉치를 눈 앞에 두고 짜증이 일어나는 걸 경험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가느다란 실을 풀어내기에는 너무도 두툼하게 느껴지는 손가락으로 투박한 손놀림을 애써 지탱해 본 적 있을 것이다. 그렇게 아무리 매달려도 쉽게 풀리지 않아서 이걸 확 잘라 버릴까 고민했던 적 있을 것이다.
원래의 실타래, 꼬여 있지 않았던 처음의 그 상태를 정확히 아는 사람만이 '반드시 풀어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이건 원래부터 이렇게 꼬여 있었던 거 아니야? 이거 못 푸는 거 아니야?'라고 의심이 들기 시작하면 그 실타래는 풀지 못 한다. 풀릴 때까지 버티는 대신, 실타래를 집어던져 버리거나 가위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리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꼬여 있지 않은 상태를 아는 사람만이 꼬여 있는 상태를 보고 '이거 꼬여 있네'라고 알아차릴 수 있다. 꼬여 있지 않은 상태가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이라면 꼬여 있는 상태를 보고 '이건 원래 이런 건가보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걸 풀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도 못할 것이다. 혹시 그런 생각이 들더라도, 자기 생각에 확신을 가지기 어려울 것이다.
원래 그러해야 하는 것은 인간사에는 없다. '당연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문장이,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지 말자' 따위의 말들이 가지는 일상적 의미만을 함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정말로 인간사에는 당연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꼭 그러해야 하는 일은 없고, 반드시 그러해야 하는 일도 없다. 우리가 함께 약속하면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는 일들이 수두룩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쉽게, 그리고 자주 익숙함의 함정에 빠진다. 우리의 선배들이 해 왔던 일들을 쉽게 나의 일로 받아들인다. 누군가가 말했던 것들을 쉽게 나의 말로 뱉어낸다.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를 기계의 부속품으로 들어가 한 몫을 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누가 꼬아놓았는지 모를 실타래 속에 들어가 수 많은 매듭 중의 하나가 되기를 자처한다.
사람이 꼬아 놓은 일은 반드시 사람이 풀 수 있다. 이 사회에 일어나는 문제들이 사람이 만든 문제라면, 반드시 그 문제는 사람이 풀 수 있다.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모두 사람이 만든 문제다. 그 실타래는 모두 사람이 꼬아 놓은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누군가가 풀어야 한다면, 그 주인공이 될 존재는 바로 같은 사람일 따름이다.
꼭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건 없다. 다르게 해 볼 수도 있다. 매번 잡아당기던 방향으로만 잡아당기지 않고, 조금 다른 방향으로 힘을 주어 잡아당기는 일에서 꼬인 실타래는 풀리기 시작한다.
물론 더 복잡하게 꼬인 실타래일수록, 한두 번 매듭을 풀었다고 해도 꿈쩍도 않을 건 당연하다. 아무리 이 실타래를 풀어낼 용기와 지혜를 얻었다고 해도, 원래의 실타래는 꼬여 있지 않았다는 진실을 알았다고 해도, 단번에 모든 매듭이 풀려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누군가가 꼬아놓은만큼, 딱 그만큼 다시 풀어내야만 하는 지난한 과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래도 목적지를 알고 길을 걷는 사람은 반드시 그 곳에 도착한다. 똑같이 길을 걸어도 목적지를 모르는 사람은 어느 곳에도 도착할 수 없는 것처럼. 이미 도착하기로 예정된 사람이라면, 지금 막 첫 발걸음을 떼었다 해도 그 발걸음은 목적지에 도착한 사람의 발걸음과 다르지 않다. 시간은 반드시 흐르고, 변화는 반드시 일어나고, 모든 것은 반드시 바뀌며, 그래서 길을 알고 길을 걷는 사람은 반드시 그 곳에 도착한다. 시간은 목적지를 아는 사람의 편이다.
꼬여있지 않은 실타래를 마음에 품은 사람은 그래서 반드시 이 모든 꼬인 실타래들을 풀어낼 것이다. 지금 막 첫 매듭을 풀어냈을 뿐이라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