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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는 이야기

이제 시작일 뿐인 모든 생(生)에게 바치는 자장가

by 융중복룡


책을 읽다가 이야기의 주인공이 부정적인 상황에 처했을 때 마침 남은 페이지가 얼마 없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혹시나 몇 장 안 남은 그 짧은 지면 안에서 상식을 뒤엎는 반전이 일어나 주인공이 해피 엔딩을 맞이할지도 모른다고 기대를 하거나, 혹은 이대로 이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나겠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위기와 좌절의 순간에 '이제 끝이다'라고 생각하고 보면, 상식적인 인과에 근거하지 않은 대반전을 바라거나 체념과 포기의 감정에 젖어 다가올 마지막 페이지만을 기다리게 되는 게 당연한 결론일 터.


그러나 같은 책을 읽더라도 첫 페이지를 펴고 몇 장 넘기지 않아서 맞이하는 주인공의 역경은, 오히려 앞으로의 전개에 대한 기대감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제 시작이다'라고 생각하고 보면, 같은 위기와 좌절이라도 전혀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반전은 기대하겠지만 그 기대가 꼭 몇 페이지 안에 어떻게든 억지를 부려서라도 반전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작위적인 조바심으로 흐르지도 않을 뿐더러, 두꺼운 책의 마지막 책장이 덮이는 순간까지 초반부의 역경이 어떠한 변화도 없이 지루하게 반복될 거라 예단하는 무기력감에도 쉽게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의 일생을 한 권의 책으로 쓴다고 했을 때, 끝까지 살아 보고 나서 책을 집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가 자기가 살아 본 페이지만큼만 와 있을 뿐이다. 얼마나 더 써야 마지막 페이지를 만날지, 그리고 그 마지막의 모습이 어떨지는 감히 단정지어 말하기 어려운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도 종종 우리는, 벌써 마지막 페이지에 와서 서 있는 사람마냥 '이제 끝났다'는 감정에 휩싸인다. 끝난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도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끝이 빤히 보인다'고 생각하는 착각에 빠졌기 때문이다.


미리 계획을 세워서 몇 살에는 뭘 해야 하고 몇 살까지는 뭔가가 되어야 한다고 머리로 그려보는 삶도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기대했던 만큼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내가 원하는 모습이 되기에는 이미 틀렸다고, 이제 끝이라고 패배감의 나락에 떨어진다면, 애써 품은 꿈이 도리어 나를 옭아매는 올가미가 되는 것은 아닐까. 나는 어떤 모습의 사람이어야 한다고, 그 모습이 아니면 다른 건 다 소용 없다고 도리질하는 태도는, 이 장난감이 아니면 안 된다고 투정부리며 떼 쓰는 어린아이의 마음과도 닮아 있다.


마지막이라는 말과 완성이라는 말은 나의 관념 속에만 존재한다. 실제로는 아무 것도 끝나지 않고, 어떤 것도 완성되지 않기 때문에. 끝이라고 단정짓는 마음에는 내가 이미 결말을 다 내다봤다고 하는 지독한 자기 기만과 오만이 깔려 있다. 있는 그대로 나의 실존을 받아들일 때, 나는 아직 끝을 모른다는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마지막이나 완성 같은 말을 붙일 곳은 내 삶 어디에도 없다는 따뜻한 진실을.


희미하게 동이 터 오는 새벽, 인간이 최초의 잠을 청한 이래 이 새벽이 오기까지 몇 번의 밤이 지나갔을까. 사람의 역사는 무수한 밤을 좌절로 지새운 자들의 역사였고, 그 좌절의 무게를 함부로 저울질하며 비웃는 자들의 역사이기도 했다. 혹자는 그 좌절을 이겨내고 새로운 한 페이지를 써 냈고, 혹자는 끝내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지만, 그들 모두 지금은 고요히 잠들어 있다. 이제 새벽이나 늦은 아침에 눈을 비비며 일어난 자들은, 오늘도 제 몫으로 주어진 새 페이지를 쓰려 펜을 쥐었고,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이 희망처럼 느껴지는 이 새벽은,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차분한 기대감으로 부풀어 오른다.


이제, 시작일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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