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지 않는 아버지를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한국시간 저녁 8시쯤에 전화한 나는 당연하게 엄마에게 물었다.
"아버지 책 보셔?" 그러자 예상치 못한 답이 돌아왔다.
"아버지 눈 아파서 요새 책 못 보셔. 바둑 채널만 보신다. "
책을 읽지 않는 아버지.... 라니...... 믿을 수 없다.
책과 관련된 나의 모든 것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글을 쓰고파 하는 욕구
매일 읽고파 하는 마음
모든 것이 다 그로부터 온 것이다.
그런 그가 이제 나이가 들어 눈이 아프고 집중력이 떨어져 읽지 못한다는 사실은
그의 인생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는 나로서는 너무 가슴이 아프다.
책 읽기는 그의 정체성 그 자체인데......
나의 어린 시절 나의 아버지는 더없이 우리 가족에게 따뜻하고 다정했지만,
우리와 티브이를 함께 본다던가, 같이 게임을 한다던가 하는 일상을 나누지는 않았다.
낮에 그는 하고 싶지 않은 일로 돈을 벌어 가장으로 책임을 다하고,
저녁엔 그가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일인 책과 공부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안방엔 항상 커다란 손님상이 펼쳐져 있었고 거기엔 책이 한 아름 쌓여 있었다.
그리고 우리 집 모든 벽은 아빠가 영업사원에게 대책 없이 사들인 수많은 전집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아버지는 분명 동아출판사 한 영업사원의 특급 호구였을 것이다.
하지만 덕분에 우리 집은 꽤 고급스러운 백과사전들과 문학 전집들이 가득했고,
매번 책 할부 값에 한숨을 푹푹 쉬던 엄마도,
어느 순간 계몽사와 금성출판사 영업사원의 우수고객이 되어 있었다.
중학생이 되자 취향이라는 것이 생긴 오빠와 나까지 동네 서점 이름이 박힌 비닐봉지를 들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렇게 자라왔다.
중고등 내내 그 어떤 대학도 못 들어갈 성적을 내도 한 마디 잔소리도 없었고,
지독한 향을 풍기는 싸구려 헤어스프레이로 머리를 하늘 치솟게 뿌리고 놀러나가도 잘 다녀와~라고 하시던 아버지였지만,
저녁에 티브이를 보는 것만은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유일한 금지사항이었다.
다정한 사람이 화를 내면 정말 무섭다. 몇 년에 한 번 내는 화라서 그게 진심임을 알기 때문이다.
우린 아버지의 퇴근시간이 되면 보고 있던 티브이를 후다닥 급하게 껐다.
저녁시간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책상에 앉아 라디오를 들으며 책을 읽는 것뿐...
그 덕에 나는 책을 읽었고, 밤에 일기를 썼고, 수많은 음악을 들었다.
나의 정체성은 티브이가 금지된 그 밤에 다 이루어졌다.
나의 모든 것은 다 그에게서 받은 것이고,
지금 나의 아침은 예전 그의 저녁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아버지는 지금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던 티브이를 위로 삼아 하루를 마무리하신다는 게 내 마음을 흔든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체력적으로 약해지는 아버지의 모습을 예상하기는 했지만
책을 읽을 수 없는 그의 모습을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인간의 삶이 유한하니
내게 지금 이대로의 모습 살게 해준 그의 삶도 역시 유한함을 알고 있다.
하지만 역시 알고 있는 것과 느끼는 것은 다르다.
나는 그의 정체성을 물려받아
나의 유한한 시간을 보낼 것이다.
아버지의 저녁을 이어 나의 아침을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