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보이지 않는 가르침
아버지는 계셔야 했다
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Jul 15. 2023
나는
한때
아버지가
안 계신 것이
다행이라 생각한 적이 있다.
친구들은
늘
그들의 아버지에게
매를 맞았다.
나의 아버지도 그럴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ㅡ
고향에 들렀다.
다락방에서 어릴 적 책을 정리하던 중,
구석에서 우연히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먼지가 보얗게 앉은 상자 안에는
아버지가 생전에 쓰신
몇 편의 일기와 한 다발의 문서가 있었다.
아버지의 유품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리지 못한다.
목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다.
세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탓이다.
어린 시절,
나는
'아궁이 불 지필 나무 안 해온다 소먹일 풀 안 베 온다 등'의 갖은 이유를 대며,
회초리를 휘두르는 친구들의 아버지를 보고 자랐다.
그때마다
나는 '아버지가 안 계신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나도 그런 아픔을 겪게 되었으리라.
그토록 두려운 아버지를 떠올리며
상자 안의 메모와 일기들을 숨죽여 읽었다.
여러 겹으로 접힌 작은 쪽지가 서류 틈새에 끼여 있었다.
낡아 부서지려 해 조심스레 펼친다.
이 쪽지를 접을 때의 아버지가 보이는 듯해 가슴이 두근거렸다.
한 뼘 남짓 쪽지에 깨알 같은 글씨가 여백 없이 가득했다.
'신뢰하는 사이에는 진심을 공유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에 가능한 가슴속 이야기는
삼가는 것이 좋다.
언젠가 인간관계는 변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상대는 나의 가슴속 이야기를 누설할 수 있다.
설령 상대가 그렇게 한다 해도
나만은 당시에 나를 철저히 믿고 한 이야기는
결코 발설하지 않겠다!'
자못 비장했다.
말의 진실과 상대 존중의 중요성을 알리는 메시지였다.
순간
글자들은 제각기 아버지의 목소리가 되어
내 귓전을 맴돌았다.
'아, 아무 때나 회초리를 마구 휘두를 아버지는 아니구나. 이것이 나의 아버지구나.'
상상 속 엄한 아버지는
순간 산산이 부서졌다.
그러고 보니,
나는 줄곧 이와 비슷한 말을 들으며 자랐다.
"입은 세 번만 사용해야 한다. 첫째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둘째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때, 셋째 남의 칭찬을 할 때,
그러나 남의 흉을 보고 싶어 입이 근지러울 때에는 목구멍으로 꾹 삼켜 똥으로 빼내거라!"
이는 할머니께서
생전에 화롯가에서
우리에게 들려주신 말씀이다.
말을 먹고 똥으로 빼내는 것에만
귀 기울여 까르르 웃었던 모습에
미소가 감 돈다.
이러한 가르침이 할머니에서 아버지에게,
아버지에서 나에게로 전해졌을 것이다.
할머니는 한평생 아들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낸 한을 품고 사셨다.
그야말로 '참척'이다.
슬픔과 한을 드러내기보다 가슴으로 삭이며
입을 무겁게 하셨기에
모진 세월을 버틸 수 있었는지 모른다.
나는 두 사람의 지혜를
두 아들에게 전하려 한다.
아들은 또 그 자녀에게 전할 것이다.
아버지와 할머니의 가르침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언제나
'지금, 여기에'
존재할 것이다.
아버지의
쪽지 글과
할머니의 화롯가 말씀은
인생의 길목에서
헤맬 때에 길라잡이가 될 것이다.
오늘따라
유독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가
보고 싶다.
고개 들어 허공을 본다.
하늘이
유난히
푸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