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비닐봉지에 담긴 제자 사랑

선생님은 그렇게 천국에 가셨다







한강 남쪽의 둔덕을 한참 오르면 작은 달동네가 있다.

서울 강남에도 이런 곳이 있을까 싶다.

그곳에서는 손바닥만 한 정원이 있다.

선생님의 꽃사랑이 향기로 가득 차 있다. 선생님의 두 손은 가늘게 얽힌 작약과 모란의 꽃을 꼭 붙잡고 있다.

나를 흘깃 보시며 그 둘의 모습이 흡사 자매와 같다고 말씀한다.

늘 그랬듯이 그 속에는 이미 내 생각을 강제한 선생님이 있다.

선생님의 어눌한 말투 속에는 늘 나를 꼼짝달싹도 못하게 하는 힘이 있다.

다른 구별법이 더 있음 직도 하나

유일하게 나무줄기가 있고 없음이다.

작약과 모란의 구별법은 그것만으로 족하다.

간결하다.

그보다 큰 배움은 따로 있다. 미물일지라도 섬세히 살피는 선생님의 사랑이다.

그렇게 꽃밭에서 한동안을 보내야 서너 평 남짓한 서재에 오르니, 통과의례인 셈이다.


말이 서재이지, 골방에 가깝다. 사방 벽을 가득 채운 책은 거지반이 고서이다. 쾨쾨한 냄새가 진동한다. 고서 고유의 냄새는 있는 법인데, 거기에 좀약 냄새까지 보탰으니

숨이 턱 막힐 지경이나

내색이 어렵다.

제 표정을 살피셨는지

"잡내 잡는 데는 좀약이 최고지"

너털웃음으로 대신한다.


창문은 구석진 곳에 덩그러니 하나가 있는데, 장정 손바닥만 하다.

남서향이기에 정오가 지나서야 해가 든다.

그것도 고작 도화지 반 장만큼의 빛이 창문에 버겁게 걸려있을 뿐이다.

그러니 책을 볼라치면 낮에도 작은 램프에 기대야 한다.


생명은 위대하다.

겨우내 죽은 듯했던 난초 줄기에서 작은 촉 하나가 머리를 내민다.

급기야 꽃을 피웠다.

그것에 시선을 고정시킨 선생님의 표정, 자못 흐뭇하다.

서재 창문 틈새로 힘 죽은 바람이 들어온다.

미풍에조차 난향이 흔들린다.

그야말로 암향일레라.

선생님은 숨결처럼 부드러운 속삭임에 귀 기울인다.

나는 지루함에 연신 나오는 하품을 참느라 애쓴다. 그 모양새 들킬세라, 힘준 안면에 마비가 온다.


한참을 난향에 취해 미소 짓는 선생님의 모습에서 무욕 무상을 본다.


선생님의 갈색 골방에서는 해가 서서히 기울어 한 뼘 길이 되었을 때,

비로소

서재에서 내려온다.


버스 정류장까지는 빠른 걸음으로 20분 거리이다.

선생님은 특유의 팔자걸음을 옮겨 배웅길에 나선다.

허름한 간판의 정육점에 들러 쇠고기 한 근 끊는다. 장비 턱수염을 한 주인장은 시퍼런 칼을 들어 넓죽한 가죽 줄에 몇 번 쓱쓱 문지른 후, 대충 도려낸다. 신문지에 둘둘 말아 검은 봉지에 담는다. 큰 덩치를 흔들대며 너스레를 떤다.

"슨상님, 오늘도 좀 더 썰었수다."

선생님은 미소를 지을 뿐이다. 역시 답은 없다.

버스에 오르기 직전 불쑥 내게 내민다.

"어머니 갖다 드리거라"

아, 선생님의 수사 없는 이 한 마디,

숨멎을 정도의 무게이다.

얼떨결에 받아 든 나, 가슴이 먹먹하다.


다른 생각이 스밀 여지가 없다.

나의 길에는 선생님의 가르침이 가득 담겨 있다. 선생님의 가르침은 그 행동 그 자체였고, 그 침묵을 통해 더욱 크게 외쳐진 것이었다. 선생님의 마음을 품고 걸어가는 이 길은 어렵지만, 그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만큼 값진 것은 없다.


언제부터인가 선생님의 마른기침이 잦아졌다. 정원은 점점 주인의 손길에서 멀어져 간다.

잠들지 못한 밤이 지나, 선생님의 소리와 함께 지나가는 시간이 더욱 약하게 만든다.

선생님의 누운 병상 침대는 늘 반쯤 눕혀져 있다.

폐가 눌리면 숨이 가빠짐을 막기 위해서이다.


선생님은 한참 동안을 한 곳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꺽정이의 힘으로 대걸레질을 하는 아주머니를 바라본다.

밭은기침으로 바짝 말라버린 입술을 버겁게 옴짝거려 한 마디 하신다.

모기 날갯짓 정도의 소리이다.

이에 온몸을 선생님께 부려야 한다.

"부럽구나, 저 아줌씨의 힘이"


다음날이다.

선생님은 영원한 안식을 찾았다.

선생님의 작약과 모란이 가득한 정원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

그러나 선생님의 가르침과 사랑은 영원히 내 마음속에 살아 있다

그 검은 비닐봉지에 담긴 사랑, 그것이 바로 선생님의 가르침이다.


내년 새봄이 될 때에

선생님 가신 그곳에도

작약과 모란이 몇 떨기 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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