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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Jun 24. 2024

기형도 시인의 '안개'를 청람 평하다

기형도 시인과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안개

                     


                                     시인 기형도








이 읍에 처음 와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안개의 군단은 샛강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다.
출근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 나오는 것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 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갯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
멀리 송전탑이 희미한 동체를 드러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흘러 다닌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고,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성역이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기형도 시인의 '안개'를 평하다.





기형도의 시 <안개>는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시는 한 편의 심오한 풍경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시인은 이 읍에 처음 온 사람들에게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고 말하면서 시작한다.
이는 마치 새로운 곳에 도착한 사람들이 느끼는 낯섦과 두려움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안개는 이 시에서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사람들의 감정과 경험을 투영하는 매개체로 작용한다. 안개의 강을 거친다는 것은 일종의 통과의례처럼 느껴진다.

첫 연에서 "거대한 안개의 강"이라는 표현은 안개의 압도적인 존재감을 나타낸다. 이는 독자들에게 시각적인 이미지를 강하게 남기며, 그 안에서 천천히 지워지는 일행들의 모습은 인간의 유한성과 고독을 상징한다. 안갯속에서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는 구절은 인내와 기다림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경악하는 순간까지 안갯속에 갇혀 있다는 것은 인간 존재의 불확실성과 고립감을 나타낸다.

두 번째 연에서는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과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라는 독특한 이미지가 등장한다. 이는 안개의 무게감과 그 안에서 비치는 태양의 이질감을 부각하며, 일상 속에서 안개가 차지하는 비중을 강조한다. 출근길의 여공들과 나무들 사이에서 느릿느릿 새어 나오는 아이들의 모습은 안갯속에서도 일상이 지속됨을 보여준다. 이는 안개에 익숙해지는 인간의 적응력을 표현한 것이다.

세 번째 연에서는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경계심을 늦추지 않다가도 곧 익숙해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인간의 습관화와 적응력을 나타내며,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라는 구절에서 그 편리함과 함께 무의식적으로 안개와 공존하게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송전탑이 희미하게 드러날 때까지 "미친 듯이 흘러 다닌다"는 표현은 안갯속에서의 자유로움과 혼란스러움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네 번째 연에서는 안개가 없는 날의 낯섦을 표현하며, 서로를 경계하는 얼굴들이 등장한다. 이는 안개가 사라진 후에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과 고독을 드러낸다. "맑고 쓸쓸한 아침"은 희소성을 강조하며, 안개의 성역이라는 마지막 구절은 이 읍의 정체성을 확고히 한다.

기형도의 시에서 주목할 점은 안개를 통해 인간의 감정과 경험을 다층적으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안개는 단순히 자연 현상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불확실성, 고독, 적응, 그리고 일상 속에서의 변화를 상징한다. 시인은 이러한 복잡한 감정을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이미지로 표현해 냈다.

표현상의 특징으로는 시각적 이미지와 감각적인 묘사가 돋보인다. "거대한 안개의 강",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노랗고 딱딱한 태양" 등의 표현은 독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며, 시적 공간을 생생하게 느끼게 한다. 또한, 안갯속에서 일상과 비일상이 공존하는 모습을 통해 독자들에게 깊은 사유를 불러일으킨다.

작가가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안개라는 매개체를 통해 인간의 복잡한 내면과 감정을 탐구하는 것이다. 안개는 시적 공간을 넘어서, 인간 존재의 불확실성과 고독, 그리고 적응의 과정을 상징한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투영하며 시를 이해하게 된다.



총평컨대, 기형도의 <안개>는 안개를 통해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섬세하게 탐구한 시다. 시인은 시각적 이미지와 감각적인 묘사를 통해 독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며, 안갯속에서의 인간 존재의 불확실성과 고독, 그리고 적응의 과정을 깊이 있게 표현했다.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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