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Aug 30. 2024
□
어린 시절의 기억은
언제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친구들과 함께한 여름날의 수박 서리 사건은
추억이 아닌
사건으로 남았다.
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아픔이다.
■
그날도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강렬한 햇빛이 내려쬐는 한낮, 마을 아이들과 함께 무언가 재미있는 일을 벌이기로 했다.
수박 서리.
여름 하면 떠오르는 시원하고 달콤한 수박,
그 수박이 멀리 밭 한가운데에서 우리를 유혹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날의 더위와 열기로 인해 우리 마음도 한층 더 무모해졌던 것 같다.
우리는 저마다 작전 아닌 작전을 세우고, 한 사람은 망을 보고 나머지는 재빠르게 수박을 챙기기로 했다. 밭으로 가는 길은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게 금기를 깨는 것만 같은 기분, 그 설렘과 긴장감이 우리를 한층 더 흥분시키고 있었다. 밭에 도착하자 녹색 덩굴들 사이로 탐스럽게 익은 수박들이 보였다.
우리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어떤 수박을 고를지 고민했다. 그 순간만큼은 모든 세상이 우리만을 위한 무대로 바뀌어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드디어 우리는 가장 크고 잘 익어 보이는 수박 하나를 골라 신중하게 덩굴을 잘랐다. 손에 쥔 수박의 차가운 감촉이 전해질 때마다, 우리 눈빛은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갑자기 "야, 거기서 뭐 하는 거야!" 하는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우리는 동시에 몸을 움츠렸다. 원두막에서 낮잠을 자던 아저씨가 우리를 발견한 것이다.
순간, 공포감이 몰려왔다.
평소 무섭게 보였던 아저씨가 마치 거대한 산처럼 우리 앞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다급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들쭉날쭉한 밭길을 뛰면서도 뒤를 돌아보니, 아저씨는 우리를 향해 큰 소리로 혼을 내고 있었다. 어디로 도망쳐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채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우리들의 모습은 아마 그 자체로도 우스꽝스러웠을 것이다.
그때는 그저 무섭기만 했다.
결국 아저씨에게 붙잡히고 말았고, 우리 모두는 하나같이 머리를 숙인 채 아저씨의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우리는 간곡하게 용서를 빌었지만
아저씨는 우리를 움켜잡고 부모님들께로 갔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우리 모두는 죄책감과 부끄러움으로 가득 찬 얼굴로 서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나를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짓을 하고 다니면 어쩌냐"라는 어머니의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속이 상하고 죄송스러운 마음이 가슴을 후벼 파고들었다.
결국, 아저씨는 변상을 강력하게 요구했고, 부모님들은 결국 수박 값을 지불해야 했다.
그 순간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어머니가 돈을 내는 그 손길이 얼마나 무거워 보였는지 모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어머니께 미안하다는 말을 여러 번 되뇌었다.
어머니는 묵묵히 걸으셨지만, 그 침묵 속에서 나를 향한 실망과 걱정이 묻어나는 듯했다. 어머니는 항상 나를 위해 애쓰셨는데, 나는 철없고 무모한 장난으로 어머니를 더 힘들게 만들었음을 깨달았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눈을 감으면 어머니의 지친 얼굴이 떠올랐고, 마음 한구석이 너무도 아팠다. 아침이 밝아오자 나는 어머니께 다시 사과드리며 앞으로는 절대로 그런 짓을 않겠다고 다짐했다.
어머니는 아무 말도 않고
꼭 안아주셨다.
시간이 흘러도 그때 어머니의 따뜻한 품을 잊을 수 없다.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 그리고 나를 혼내셨던 엄한 목소리, 모든 것이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그날의 사건은 어린 마음에 깊은 교훈을 남겼고,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 주었다.
그 어머니는
지금 이 세상에 안 계시다.
어린 시절의 수박 서리 사건은 나에게 단순한 장난이 아닌, 깊은 반성과 성장의 시작점이 되었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