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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신의 기억 속을 걷다

청람 김왕식












고무신의 기억 속을 걷다



김왕식









문득,
먼지 가득한 신발장에서 잊힌 고무신 한 켤레를 발견한다. 검정 고무신, 짧고 소박한 이름만큼이나 단순하고 검소했던 그 신발 한 켤레가 내 어린 시절의 수많은 기억들을 불러일으킨다. 새 신발을 손에 쥐고 발보다 큰 꿈을 꾸던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들이 고무신의 검은 표면 위로 선명하게 떠오른다.

검정 고무신을 처음 신던 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마치 새로 태어난 아기처럼 낯설고 어색한 느낌이 든다. 그때는 발이 자라는 속도가 어찌나 빨랐던지, 어머니는 늘 나보다 큰 고무신을 사 주셨다.
발보다 훨씬 커서 헐렁한 그 신발 속에, 나는 나보다 더 크고 넓은 세상을 상상하곤 했다. 발끝이 땅을 제대로 딛지 못하고 허공을 떠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 헐렁함 속에서 작은 모험심과 자유를 느낄 수 있었다.

맨발로 걷다 보니 길 위에 쌓인 작은 흙먼지마저도 반짝이는 새벽 별처럼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그 작은 고무신 한 켤레가 내 발을 감싸고 있을 때, 세상은 무한히 넓어 보였고, 그 길 끝에는 무엇이든 있을 것 같았다. 새벽녘에 동네 골목을 걸으며, 맑은 공기를 들이마실 때마다 마음속에 큰 꿈을 품곤 했던 어린 시절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어린 시절, 고무신은 친구들과의 소중한 놀이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친구들과 고무신을 벗어두고 뛰어놀다가 헷갈려 다른 친구의 신발을 신고 가버릴까 봐, 우리는 각자의 고무신에 나름의 비밀 표시를 새기곤 했다. 크레용으로 작게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신발 속 바닥에 작고 비밀스러운 문양을 그려 넣기도 했다.
고무신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였는지를 알 수 있는 순간들이었다. 그렇게 저마다의 고무신에는 우리들만의 비밀이 담겨 있었고, 그 비밀은 우리의 동심을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고무신은 닳고 닳아 낡아졌다. 발뒤꿈치가 까지고, 신발의 바닥이 얇아져서 돌멩이가 쉽게 느껴지곤 했다. 그 낡은 고무신이 여전히 가장 편안한 신발이었던 까닭은, 젖어도 금세 털어내고 말릴 수 있었던 그 단순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고무신의 단순한 매력은, 어려운 시절을 살아가던 우리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 듯했다.
때로는 발끝이 까지고, 손가락 하나 들어갈 정도로 헐렁한 신발이었지만, 그 헐렁함이 오히려 우리를 더 자유롭게 해 주었다.
운동화처럼 단단히 죄지 않아도, 우리는 그 속에서 우리만의 리듬을 찾고, 그 리듬에 맞춰 인생의 첫걸음들을 내디뎠던 것이다.

어린 시절, 강가에서 물장구를 치며 놀 때, 고무신 안에는 물이 가득 차올랐다. 물가에서 작은 송사리들을 손으로 건져 올리면, 그것들이 고무신 안에서 반짝이며 생명의 존재감을 뽐냈다.
어린 마음에는 고무신 속의 물고기들이 마치 작은 연못처럼 보였고, 그 안에서 펼쳐지는 작은 생명의 이야기가 참으로 경이로웠다.
그러다가 신발이 강물에 떠내려가 버린 적도 있었다. 그럴 때면 아쉬움은 잠깐이었고, 곧 익숙한 것들과의 이별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가곤 했다. 낡아 익숙해진 것들이 사라질 때의 감정은, 새로운 것을 향한 호기심과 미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그것이 아마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겪었던 이별의 연습이었겠지.

또 엿장수 아저씨가 동네에 찾아올 때면, 오래된 고무신 한 짝을 들고 엿과 바꾸었던 기억도 난다.
그 시절, 신발 한 켤레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었다. 발보다 신발이 더 귀했던 날들, 작은 것 하나하나가 소중하게 여겨지던 그 시절이 그립다. 엿 한 조각을 입에 물고, 달콤한 맛에 웃음 짓던 그 순간들, 그 모든 것이 고무신 한 켤레 안에 녹아 있었다.

이제는 모든 것이 흔해진 시대다.
신발 한 켤레가 쉽게 버려지고, 쉽게 잊히는 시대. 어린아이들은 알지 못한다. 우리의 발끝에 새겨진 작고도 소중한 기억의 흔적들.
그들이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그 시절의 우리는 고무신 한 켤레에 많은 것을 담고 살아갔다. 작은 고무신 속에는 우리 모두의 어린 시절, 꿈과 희망, 소소한 행복이 녹아 있었다.
그 고무신은 여전히 우리 마음 한구석에서 잊히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그때는 정말 소중한 것들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검정 고무신 한 켤레는 단순한 신발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의 기억이었고, 꿈이었으며, 어린 시절의 순수함이 깃든 상징이었다.
오늘도 그 고무신을 바라보며, 우리는 그 시절의 따뜻한 추억 속을 다시 한 번 걷는다.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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