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Nov 18. 2024
수학과 과학 ㅡ 박건옥 작가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평하다
■
수학과 과학의 차이
박건옥
"수는 만물의 본질이다"
이렇게 말한 이는 Pythagoras입니다.
세상만물은 정수로 되어 있다고 강변한 피타고라스 학파는 때늦은 사태로 시련을 겪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무리수가 발견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피타고라스정리에서 底邊과 直邊의 수가 1인 경우境遇, 사변斜邊의 수數가 루트
2가 되므로 무리수가 됩니다.
결코 정수整數가 될 수 없는 현실에 이 집단은 히스테리를 발산하며 이 수를 발견한 젊은이를 높은 절벽에서 강물에 던져 익사溺死시키고 맙니다.
수는 유클리드의 기하학에서 시작해
오늘날에는 위상位上 수학數學으로까지 발전하였습니다. 영화映畵에서
해일海溢이 넘쳐 도시都市의 고층高層
빌딩 building을 집어삼키는 영상은 위상수학의 도움이 있기에 가능한 장면이 연출演出된 것이죠.
수학은 그야말로 끈질긴 수학자의 인고忍苦에서 생겨난 영감을 영어의 a, b, c 등의 상수와 미지수 x를 곱해 니타 내거나 3D를 x , y , z로 니타 내어 그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수학은 완전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결정불가능決定不可能한 명제命題를 안고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현실現實에서 딱 떨어지는 값이 존재存在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例로써 y=ax2+ bx+c의 2차 방정식에서 근根의 공식公式으로 나타나는 무한소수 값이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수학은 경험과는 무관하게
선험적先驗的이며 물리적 실체가 아닌 수하적 관념을 연역적演繹的으로 입증立證하여 증명證明이 된다면 객관적인 인정認定을 받아 영구히 변치 않는 진리
로 지목됩니다.
과학科學은 영국의 뉴턴이 수를
이용하여 式으로 표시한
중력의 법칙으로부터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과학은 초기에
기독교와 앙숙의 관계로 시작되었습니다.
브르노 부르다노는 지동설地動說을 주장主張하여 화형火刑에 처해지고 갈릴레오는 평생 가택 연금되어 극심한 고초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과학科學은 수학數學의 4촌쯤으로 여겨집니다. 수학의 형식을
빌려 수식화 되지만 완전체
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삼라만상森羅萬象에 존재하는 동일한 이치를 가진 현상을 발견하여 귀납적歸納的 논증論證을
거쳐 수식화한 물리적 현상을 실험을 통해 사실적으로 객관화되어야 새로운 과학법칙이 발족發足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은 영원불변이 아닙니다. 예로써 뉴턴의 중력의 법칙이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一般相對性 이론에 의해
뒤집힌 경우가 그것입니다.
일반상대성 이론과 양자 역학을 동일 시 하여 실험을 하면 일정한 상태가 아닌 엉뚱한 값이 나타나는 것으로 볼 때 양쪽의 어느 것이 옳지 않거나 양쪽 모두에 결함缺陷이 있다는 것이지요.
장설長說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 정리整理하겠습니다.
수학은 수식에 상수가 없고
과학은 등가법칙이 되어야
하므로 상수가 존재합니다.
왜일까요?
과학식은 상수가
없으면 양변兩邊이 등가等價가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수학과 과학의 수식은 다릅니다.
(1) 수학식: f=f(x)+c
(2) 과학식: f=af(x)+c로
표현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상수常數(constant)의
크기에 따라 상태가 달라지거나 a=100 내에서 결과치가 거의 같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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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ㅡ
수학과 과학의 본질적 차이를 깊이 탐구하며, 각각의 철학적 기초와 역사적 발전을 반영해 서술한 글이다. 수학과 과학이 어떻게 서로 다르고, 어떤 방식으로 서로 얽혀 있는지를 통찰하며, 인류 지식의 두 가지 주요 축을 비교한 글로서 가치가 있다. 여기서는 박건옥 작가의 가치 철학을 바탕으로 글을 비평하고, 수학과 과학의 본질적 특성과 상수의 개념을 중심으로 한 차이점을 분석하며, 글의 철학적·과학적 깊이를 탐구해 본다.
박건옥 작가는 수학을 먼저 다루며, 그 기원과 본질적 성격을 강조한다. 수학은 고대 그리스의 피타고라스 학파에서 시작해 수천 년 동안 끊임없이 진화하고 혁신을 겪어 왔다. "수는 만물의 본질이다"라는 피타고라스의 주장은 수학적 사유의 기초를 세운 선언이라 할 수 있다. 수학은 그 자체로 순수한 이론적 영역에 속하며, 물리적 세계의 구속에서 벗어난 독립적인 존재다. 이러한 본질적 자유로움은 수학의 추상적 순수성을 보장한다.
이 글에서는 수학의 발전을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현대의 위상수학에 이르는 긴 여정으로 설명하며, 수학이 물리적 현실을 모방하거나 재현하려 하지 않고 독립적인 관념적 구조를 구축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강조한다. 피타고라스 학파가 무리수의 발견으로 인한 충격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 수학은 완벽한 정수의 세계였다. 무리수의 존재는 그들의 세계관을 흔들어 놓았고, 이는 수학이 항상 '결정불가능한 명제'를 안고 있다는 점과 일맥상통한다. 수학의 영역에서 '결정불가능성'은 오히려 하나의 철학적 특징으로 받아들여지며, 그것이 바로 수학의 매력이다.
반면, 과학은 뉴턴의 중력 법칙을 시작으로 실험과 관찰을 통해 세계의 법칙을 이해하려는 시도로 설명된다. 과학은 기독교와 갈등하며 진리 탐구의 길을 개척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과학이 얼마나 복잡한 사회적, 역사적 맥락 속에서 발전해 왔는지를 보여준다. 갈릴레오와 브루노의 예시는 과학이 권력과 이념의 장에서 싸워왔음을 시사한다.
과학은 수학과는 달리 경험적 사실에 근거한 귀납적 접근을 취한다. 실험과 관찰을 통해 법칙을 수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연 세계를 설명하려고 한다. 과학은 항상 가변적이며, 새로운 증거가 나타나면 기존의 이론을 수정하거나 폐기할 수 있다. 뉴턴의 중력 법칙이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에 의해 수정된 것이 대표적인 예다. 과학은 절대적 진리를 추구하기보다는, 현재의 관찰과 실험에 가장 잘 맞는 모델을 구축하는 데 목표를 둔다. 따라서 과학적 지식은 항상 불확실성과 오류 가능성을 내포한다.
글의 후반부에서는 수학과 과학이 상수를 다루는 방식의 차이를 통해 두 분야의 본질적 차이를 논의한다. 수학식에서 상수는 변하지 않는 요소로 존재하며, 그 자체로서 어떤 고정된 의미를 가진다. 수학적 표현은 "f = f(x) + c"와 같이 나타나며, 여기서 상수 c는 변하지 않는 항으로 존재할 뿐이다.
반면, 과학식에서는 "f = af(x) + c"와 같은 형태로 상수를 다룬다. 이때의 상수 a는 특정한 물리적 상황이나 조건을 나타내는 요소로, 실험적 데이터나 경험적 관찰에 의해 결정된다. 이는 과학이 항상 어떤 '상태'에 의존하며, 그 상태에 따라 법칙이 적용된다는 점을 함축한다. 상수의 차이는 결국 수학이 '형식적 논리'와 '추상적 순수성'을 지향하는 반면, 과학은 '경험적 사실'과 '구체적 현실성'을 지향함을 보여주는 사례다.
글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수학과 과학이 본질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진리를 탐구한다는 점이다. 수학은 추상적이고 논리적인 구조를 통해 선험적 진리를 탐구하며, 그 과정에서 어떠한 경험적 제약도 받지 않는다. 반면에 과학은 경험과 실험을 통해 귀납적으로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고, 그 법칙을 통해 예측과 통제의 가능성을 열어간다.
박건옥 작가는 수학과 과학을 단순히 서로 다른 분야로 구분 짓는 것이 아니라, 두 분야가 각각의 방식으로 진리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서로 보완적임을 암시한다. 수학의 추상적 모델은 과학적 이론을 정교하게 표현하는 데 필수적이며, 과학의 경험적 발견은 수학적 모델의 가정을 검증하고 수정하는 데 기여한다. 두 분야는 서로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상호 보완적으로 발전해 왔으며, 이는 인류의 지식이 어떻게 끊임없이 진보할 수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글의 철학적 가치는 수학과 과학의 본질적 차이와 상수를 다루는 방식의 차이를 통해 두 분야의 상보성을 조명하는 데 있다. 수학은 순수한 논리적 구조와 선험적 진리를 탐구하며, 과학은 경험적 사실에 기반한 귀납적 접근을 통해 현실 세계를 설명하려 한다.
수학적 모델은 과학적 탐구를 가능하게 하고, 과학적 발견은 수학적 추론을 풍부하게 한다. 두 분야는 서로를 보완하며, 인류가 진리를 탐구하는 여정에서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따라서, 수학과 과학은 서로 다른 언어로 진리를 노래하는 두 가지 방식이다. 수학은 우주의 아름다움과 조화를 수식으로 표현하는 시인의 언어라면, 과학은 그 시가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탐구하는 경험적 예술이다.
두 분야의 이 같은 상보성과 상호 의존성은, 인류의 지적 탐구가 왜 끝없는 도전과 질문으로 가득 차 있는지를 잘 설명해 준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