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란 시인의 '시대를 짖는 견격犬格 '을 평하다
청람 김왕식
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Sep 5. 2024
■
시대를 짖는 견격(犬格)
시인 정해란
고도비만의 눈금이
헐떡이는 숨소리마다 쏟아지는
반려견 산책 시간
동행하던 주인의 아침도 뒤뚱거린다
여름 햇살이 수직으로 서기 전
산책을 서둘러 마쳐야 할 텐데
호기심 많은 후각으로 탐색하다가
긴 여름 식히려 빼낸 혀처럼
주인의 시간을 빼내는 반려견
독거노인의 고독사 그래프는 치솟는데 출산율 기울기는 가파르게 떨어지는데
두 그래프 사이에 애완견 꼬리가 살랑거린다
부모가 보고 싶어 찾는 집이 아니라 반려견이 보고 싶어 찾는다는 집
슬기로운 애완견 생활을 터득한 종족 서류에만 빠진 완벽한 가족이다
때로 인격보다 견격(犬格)을 높여주니 서열 밖으로 밀려난 건 진짜 가족들
주인의 자유에 족쇄라고 느껴지면 책임감은 언제든 삭제되는 걸까
재개발로 떠나간 빈터에
자식 기다리는 노모처럼
주인 기다리는 유기견 울음 가득
이 시대의 모순과 위선을
슬픈 눈으로 왈왈 짖는다
□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ㅡ
정해란 시인은
현대 사회의 변화와 그에 따른 인간의 삶의 모습을 깊이 있게 탐구하는 중견 작가이다.
그의 작품에서는 인간 본연의 감정과 함께 현대 사회가 만들어낸 다양한 현상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드러난다. '시대를 짓는 견격(犬格)'은 이러한 정해란 시인의 가치철학이 잘 담긴 시이다.
이 시는 현대 사회에서 반려견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존재 의미와 사회적 가치, 가족의 개념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탐구한다. 시인은 반려견을 매개로 하여 인간의 자유, 책임감, 가족의 의미와 같은 심오한 주제를 다룬다.
시는 비록 짧지만, 그 안에 담긴 풍부한 감정과 날카로운 통찰은 독자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고도비만의 눈금이 / 헐떡이는 숨소리마다 쏟아지는 / 반려견 산책 시간 / 동행하던 주인의 아침도 뒤뚱거린다"
첫 번째 연은 반려견伴侶犬과 주인의 산책 시간에 대한 묘사로 시작한다. 여기서 '고도비만의 눈금'은 주인이든 반려견이든 그들의 상태를 나타내는 metaphor로 볼 수 있다. '헐떡이는 숨소리'는 산책이 필요하지만 동시에 고통스러울 수 있는 상황을 암시한다.
이러한 묘사는 현대인의 건강 문제와 운동 부족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반려견 산책 시간이 주인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모습을 통해, 시인은 반려견과 주인 사이의 상호 의존적 관계를 조명한다. 주인의 아침도 '뒤뚱거린다'는 표현에서, 현대인의 삶이 그리 단단하지 않고, 흔들리는 상태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여름 햇살이 수직으로 서기 전 / 산책을 서둘러 마쳐야 할 텐데 / 호기심 많은 후각으로 탐색하다가 / 긴 여름 식히려 빼낸 혀처럼 / 주인의 시간을 빼내는 반려견"
두 번째 연에서는 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기 전에 산책을 끝내려는 주인의 조급한 마음과, 호기심 많고 자유로운 반려견의 행동을 대비시키고 있다. '긴 여름 식히려 빼낸 혀처럼'이라는 표현은 반려견의 행동이 마치 무의식적으로 시간을 끄는 것처럼 묘사한다. 반려견의 이러한 행동은 인간의 계획된 시간과 질서에 대해 자연스럽게 저항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이 계획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것에 반해,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존재들이 가지는 시간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독거노인의 고독사 그래프는 치솟는데 / 출산율 기울기는 가파르게 떨어지는데 / 두 그래프 사이에 애완견 꼬리가 살랑거린다"
세 번째 연에서는 현대 사회의 문제, 즉 고령화와 저출산 문제를 시각적인 이미지로 그려낸다.
'독거노인의 고독사 그래프'와 '출산율 기울기'는 현대 사회의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상징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애완견 꼬리가 살랑거린다'는 표현은 반려견이 이 사회적 문제의 한가운데에 있음을 나타낸다.
반려견이 사람의 외로움을 채우는 존재가 된 것은, 그만큼 사람 간의 관계가 약해지고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 부분은 반려견이 더 이상 단순한 애완동물이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부모가 보고 싶어 찾는 집이 아니라 / 반려견이 보고 싶어 찾는다는 집"
네 번째 연에서는 현대 사회에서 가족의 개념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짧고 강렬하게 보여준다.
과거에는 부모가 보고 싶어서 찾아가는 집이 가족의 개념이었다면, 이제는 반려견이 보고 싶어서 찾아가는 집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가족의 의미가 변질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 문장은 현대인들이 감정적으로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반려견을 선택하고 있음을 비판적으로 보여준다.
"슬기로운 애완견 생활을 터득한 종족 / 서류에만 빠진 완벽한 가족이다 / 때로 인격보다 견격(犬格)을 높여주니 / 서열 밖으로 밀려난 건 진짜 가족들"
다섯 번째 연에서는 현대 사회에서 반려견의 지위가 때로는 인격보다도 높게 평가되는 현상을 꼬집는다. '서류에만 빠진 완벽한 가족'이라는 표현은 제도적이거나 형식적으로는 완벽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족의 본질적 의미가 결여된 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현상은 '진짜 가족들'이 서열 밖으로 밀려나는 현실을 드러내며, 시인은 이를 통해 현대 사회의 가치관이 어떻게 왜곡歪曲되고 있는지를 비판하고 있다.
"주인의 자유에 족쇄라고 느껴지면 / 책임감은 언제든 삭제되는 걸까 / 재개발로 떠나간 빈터에 / 자식 기다리는 노모처럼 / 주인 기다리는 유기견 울음 가득"
여섯 번째 연에서는 반려견을 돌보는 책임이 주인에게 자유에 대한 족쇄로 느껴질 때, 쉽게 책임을 저버릴 수 있는 현대인의 모습을 비판한다.
'재개발로 떠나간 빈터'와 '자식 기다리는 노모처럼'이라는 이미지는 버려진 유기견의 슬픔과 절망을 강조한다.
이 부분은 반려견의 충성과 사랑에 대한 인간의 무책임함을 상기시키며, 현대 사회의 이기적인 면모를 고발한다.
"이 시대의 모순과 위선을 / 슬픈 눈으로 왈왈 짖는다"
마지막 연에서는 시대의 모순과 위선을 반려견의 '왈왈' 짓는 소리로 상징화하여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반려견은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현대 사회의 여러 모순과 위선을 폭로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시인은 이를 통해 인간 사회의 진정한 문제를 날카롭게 꼬집고 있다.
'시대를 짖는 견격(犬格)'은 반려견을 통해 현대 사회의 여러 문제를 탐구하고 비판하는 시이다.
시인은 반려견과 인간의 관계를 통해 현대 사회의 가치관, 가족의 의미, 자유와 책임의 문제를 다층적으로 제시한다.
정해란 시인의 시는 깊다.
표현의 정치精緻함과 시인 특유의 이미지 구현은 독자로 그 속에 담긴 깊은 의미를 곱씹게 만든다.
또한 시인은 인간의 삶과 사회의 진실을 탐구하는데, 그 방식은 때로는 유머러스하면서도 비극적이다.
이 시는 정해란 시인의 독특한 시각과 날카로운 통찰이 맘껏 발현된 수작秀作임에 틀림없다.
ㅡ 청람 김왕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