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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을 오른다

청람 김왕식









산길을 오른다






청람





비가 그치고, 하늘은 깨끗한 숨결을 토해낸다. 삽상颯爽한 가을바람이 불어와 피부에 닿는다. 마치 오랜 친구가 손을 살며시 잡아주는 것처럼, 그 바람에는 따스함과 설렘이 함께 깃들어 있다.
천천히 산길을 오른다.
발밑으로 잔잔히 흐르는 자연의 숨결을 느끼며, 나의 호흡도 그에 맞춰 부드럽게 흐른다.

산길을 오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이 길은 늘 새로운 이야기를 품고 있다. 오늘은 비가 그친 뒤라서인지 그 이야기는 더욱 생동감 있다. 물기 머금은 나뭇잎들 사이로 햇살이 부드럽게 흩어지고, 그 빛의 조각들이 마치 악보 위의 음표처럼 잎새 위에 내려앉는다. 빛은 강하지 않다. 오히려 은은하고, 은밀하다. 대지 위를 살며시 미끄러지며 잎사귀 하나하나를 깨운다. 그 빛을 받아 일렁이는 대지 위에는 들꽃들이 반짝인다. 그 향기가 가을의 노래처럼 퍼져나간다. 노란 들국화, 보라색 제비꽃, 붉은 잔디꽃이 서로 다른 음을 지니고 있지만, 그 조화로움이 마음을 울린다.

가을은 사람들에게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 산길을 오르는 동안 내 삶을 반추反芻하게 된다. 가끔은 인생도 이 산길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산길을 오르며 우리는 여러 가지 길을 만난다. 어떤 길은 부드럽고 평탄하지만, 어떤 길은 험난하고 가파르다. 모든 길이 끝이 있다는 점에서 같다. 그 길의 끝에서 우리는 숨을 고르고, 잠시 쉬며 그 길을 돌아보게 된다.
다시 또 다른 길을 찾아 나선다.

비가 내린 후의 빗방울이 아직 나뭇잎 끝에 매달려 있을 때, 그 빗방울 속에 담긴 작은 세계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빗방울 속에는 작은 우주가 있다. 고요히 젖어드는 그 빗방울은 어쩌면 우리의 삶과도 비슷하다. 삶은 늘 빗방울처럼 고요히 젖어들고,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그 속에서 많은 것들이 일어난다. 빗방울 속 작은 세계처럼, 우리의 마음속에서도 많은 감정들이 오가고 스며든다.
어느 순간 눈부신 햇살이 빗방울을 감싸 안으며 포옹하듯 따스하게 녹인다. 그 순간 빗방울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변화해 자연으로 돌아간다. 우리 삶의 많은 순간들도 그렇게 스며들고, 포옹되고, 흩어지며 이어진다.

이렇게 산길을 오르다 보면, 사랑 또한 이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은 마치 우리가 산을 오를 때의 길과도 같다. 사랑의 길은 언제나 평탄하지만은 않다. 때로는 돌길을 만나기도 하고, 때로는 가시덤불이 길을 막기도 한다.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서로를 알아가고, 때로는 서로를 밀어주며, 때로는 서로를 끌어안으며 함께 걸어간다. 사랑은 겹겹이 쌓인 순간들로 이루어진다. 그 순간들은 처음에는 얕은 물결처럼 시작되지만, 점점 시간이 쌓이며 깊은 바다를 이룬다.
그 바닷속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다가서고, 또 멀리서 다정히 속삭이며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다.

자연과 사람,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하나의 노래가 된다. 우리는 그 속에서 비로소 서로를 만나게 된다. 산을 따라 흐르는 바람처럼 우리의 길도 그렇게 흘러가기를 바란다. 바람은 때로는 거세게 불어와 나뭇가지를 흔들고, 때로는 아주 조용히 불어와 꽃잎을 살짝 스친다. 우리의 삶도 그러하다. 때로는 폭풍 같은 시련이 닥치기도 하지만, 때로는 고요한 평화가 찾아오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그 바람 속에서도 우리의 길은 계속된다는 것이다.

오늘 이 산길을 오르며 깨닫는다.
삶의 여정에서 우리는 때로는 흔들리고, 때로는 멈춰 서기도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가 걸어가는 이 길 위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사랑하며 살아가는가이다. 산을 오르다 보면 힘들어서 잠시 숨을 고르기도 하고, 때로는 내려가고 싶어질 때도 있다. 산길의 끝에서 바라보는 그 풍경은, 그 길을 걸어온 모든 순간들이 모여 이루어진 결과물이다.

우리의 삶이란 그리하여, 이 산길을 오르는 것과 닮아 있다. 비가 그친 뒤 맑아진 하늘 아래, 가을바람이 속삭이는 이 길에서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걸어간다. 우리의 길도 산을 따라 흐르는 바람처럼 순수하게, 부드럽게, 그리고 아름답게 흘러가기를 소망해 본다.
그렇게 우리는, 이 순간순간을 살아가며, 하나의 아름다운 삶을 완성해 간다.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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