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연희 시인의 '노상 그랬어'를 청람 평하다
청람 김왕식
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Sep 7. 2024
■
노상 그랬어
시인 文希 한연희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보여도
입 꾹 닫고 견뎠다지
마치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태풍의 눈 같은 사나운 고요
생명을 앗아갈 것 같은 광풍
그분 외엔 아는 자가 없었다지
공기처럼 느껴지지 않고
어찌나 더딘지 끝내
응답 없을 것만 같은 공허
그 고비를 몇 번 넘었는지
헤아리다 기억에서 모두 지웠어
곱씹을수록 감정이 휘몰아치니까
지워지기엔 너무 깊은 상처였나 봐
눈부신 햇살이 비치니까 다 보이더군
그분의 존재가 나 자신의 무능에 가렸던 거야
□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ㅡ
한연희 시인은 삶의 고난과 아픔을 깊이 있는 시선으로 통찰하며 그 속에서 인간의 내면과 영혼의 문제를 탐구하는 시인이다.
그녀의 시는 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진실된 고백과 더불어 그 고백을 통해 보다 넓은 인간의 보편적 감정을 드러낸다.
"노상 그랬어"는 그러한 한연희 시인의 시적 세계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시는 고난 속에서 인간이 느끼는 감정의 혼란과 그 안에서의 구원과 치유를 다룬다.
특히 이 시는 삶의 불확실성과 혼란 속에서 견딤의 미학을 그리고 있다. 작가의 삶의 경험이 시에 깊이 녹아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삶의 고비를 넘으며 감내했던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게 한다.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보여도 / 입 꾹 닫고 견뎠다지"
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인내와 견딤을 나타낸다. 시인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입을 꾹 닫고' 견뎠다는 표현을 통해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자세를 드러낸다. 이러한 표현은 삶의 어려움과 그 안에서의 불확실성을 암시한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그런 상황에서의 침묵은 때로는 가장 강력한 대응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여기서 "입 꾹 닫고"라는 표현은 외부의 소음과 혼란 속에서도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듣고자 하는 시인의 태도를 보여준다.
"마치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은
앞선 구절과 연결되어 있다.
고난 속에서의 침묵과 견딤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렇지 않은 듯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장은 그 속에 깔린 고통과 무게를 암시하며, 단순히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려는 시인의 시도는 내면의 깊은 슬픔과 고통을 감추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이는 곧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자신을 무너지지 않도록 유지하려는 시인의 태도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자세 중 하나다.
"태풍의 눈 같은 사나운 고요 / 생명을 앗아갈 것 같은 광풍"
은
내면의 고통과 혼란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태풍의 눈'이라는 이미지는 겉으로는 고요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이 구절에서 '사나운 고요'는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는 상태이지만, 그 속에 잠재한 격렬한 감정을 암시하며, '생명을 앗아갈 것 같은 광풍'은 그 감정이 터져 나올 때의 파괴적인 힘을 표현한다. 이는 시인의 내면의 갈등과 고통을 더욱 극적으로 느끼게 하는 중요한 요소다.
"그분 외엔 아는 자가 없었다지"
는
신적 존재나 절대자에 대한 암시로 읽힌다.
인간의 고통과 불확실성 속에서 오직 신만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믿음을 표현하고 있다. 이는 시인의 종교적 신념을 엿볼 수 있는 부분으로, 인간의 무력함과 동시에 신의 전지전능함을 대조시켜 그 의미를 부각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삶의 고통과 혼란 속에서 인간이 느끼는 고독과 신에 대한 절대적 의지를 드러낸다.
"공기처럼 느껴지지 않고 / 어찌나 더딘지 끝내 / 응답 없을 것만 같은 공허"
는
시인이 느끼는 절망과 공허함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공기처럼 느껴지지 않고'라는 표현은 존재의 불투명함과 불확실성을 상징하며, 시간이 지나도 결코 도달하지 못할 것 같은 '공허'는 삶의 무게를 더욱 실감나게 만든다. 여기서 '응답 없을 것만 같은 공허'는 시인이 느끼는 외로움과 절망감을 극적으로 표현하며, 인간이 느끼는 가장 근본적인 두려움인 '부재'와 '무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그 고비를 몇 번 넘었는지 / 헤아리다 기억에서 모두 지웠어"
는
그동안 시인이 겪어온 수많은 고난과 고통의 순간을 회상하고 있다. '기억에서 모두 지웠어'라는 표현은 그 고통이 너무나도 강렬해서 더 이상 기억조차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내포한다. 이는 곧 그동안 시인이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었는지를 암시하며, 그 모든 고통을 견뎌내며 살아온 과거의 시간을 반추하게 한다. 이 행은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은 깊은 상처와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시인의 노력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곱씹을수록 감정이 휘몰아치니까"
는
그동안의 고난과 고통을 곱씹을수록 다시금 그 감정이 격렬해진다는 것을 표현한다. 이는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그 회상 속에서 감정이 다시금 살아나며, 그로 인해 시인이 겪는 내면의 격동을 의미한다. 이 구절을 통해 시인은 고통의 기억을 반복적으로 떠올리며 그 속에서 끊임없이 휘몰아치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보여주고 있다.
"지워지기엔 너무 깊은 상처였나 봐 / 눈부신 햇살이 비치니까 다 보이더군 / 그분의 존재가 나 자신의 무능에 가렸던 거야"
는
고난과 고통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진리를 이야기한다.
'눈부신 햇살이 비치니까 다 보이더군'이라는 구절은 고통의 시간들이 지나가고 나서야 진정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분의 존재가 나 자신의 무능에 가렸던 거야'는 시인이 결국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신의 존재만을 원망했던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는 곧 시인이 궁극적으로 깨달은 지혜와 성찰을 상징한다.
이 시는 한연희 시인의 내면을 투영하는 작품으로, 그의 시세계는 삶의 불확실성, 고통, 그리고 그 속에서의 깨달음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시는 겉으로는 간결하고 단순한 표현을 사용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매우 깊고 복합적이다.
한연희 시인은 시를 통해 인간 존재의 복잡성과 그 안에서의 구원을 탐구하며, 독자에게 삶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 '노상 그랬어'는 인간의 삶과 고난, 그리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진정한 자신과의 만남을 섬세하고 다층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이러한 면에서 시는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탐구하는 예술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