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선희 시인의 빈병을 청람 평하다
청람 김왕식
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Sep 1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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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병
시인 배선희
일기장 곁에는 빈 병이 하나 있다.
일기를 쓰다가 빈 병을 들여다본다
많은 꽃들이 발길을 내리고
내게 붙들려 목말라했고
바람 한 가닥 스치지 않아 숨죽였던가
붉은 자줏빛으로
모과처럼 묵직한 무게로
짙은 향내음을 내뿜는 자스민
때로는 영광스러운 월계수
한련화 꽃잎처럼 매운 날로도
박하향처럼 짜릿함으로도
괭이풀처럼 시큼한 날로도
낡은 일기장을 펼치고
하얀 광목천에 오색실로 수를 놓아본다
빨간 장미꽃은 님이 보내신 사랑의 꽃
노란 해바라기는 목표를 맴도는 꽃
분홍빛 봉숭아꽃은 벗들과 손톱에 물들이며
첫사랑이 이루어지길 기원하던 꽃
커다란 자색목단은 양기를 북돋아줄 영양제
일기장을 덮고 다시 빈 병을 응시한다.
남은 생에 수를 놓을 꽃들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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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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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선희 시인은 삶의 구체적 경험과 일상에서 느끼는 감정들을 섬세하게 포착해 내는 작품 세계를 구축한 시인이다. 그의 시는 독자에게 일상적인 순간 속에서 숨어 있는 깊은 의미를 성찰하도록 유도한다.
특히, 이번 시 '빈 병'은 일기장 옆에 놓인 빈 병을 통해 인생의 다양한 순간들과 감정을 투영하는 시인의 감각적이고 철학적인 접근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빈 병을 통해 삶의 공허함과 동시에 그 공허함을 채우려는 인간의 욕망을 동시에 다루고 있으며, 일상적 사물에서 큰 의미를 찾아내는 그의 시적 감수성이 명료하게 드러난다.
"일기장 곁에는 빈 병이 하나 있다.
일기를 쓰다가 빈 병을 들여다본다"
시의 도입부는 매우 일상적인 장면으로 시작한다. '일기장 곁에 있는 빈 병'은 시인의 내면을 상징하는 중요한 사물이다. '일기를 쓰다가 빈 병을 들여다본다'는 행위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그 안의 공허함을 마주하는 순간이다. 일기와 빈 병이라는 두 대상은 모두 과거의 기록과 비워진 현재를 동시에 나타내며, 이 둘을 통해 삶의 의미를 묻는 시인의 철학적 고뇌가 엿보인다.
"많은 꽃들이 발길을 내리고
내게 붙들려 목말라했고
바람 한 가닥 스치지 않아 숨죽였던가"
여기서 '꽃들'은 시인의 삶에 한때 존재했던 다양한 감정과 경험들을 상징한다. 이 꽃들은 시인의 인생을 잠시 스쳐 지나간 감정들로, '발길을 내리고', '붙들려 목말라' 했다는 표현은 시인이 그 감정들과 경험들을 붙들고 있었으나 충분히 살아 숨 쉬지 못했던 것을 암시한다. '바람 한 가닥 스치지 않아 숨죽였던가'라는 구절은 정체된 삶의 한순간을 상징하며, 감정이 억눌리고 고여 있는 상태를 표현한다. 시인의 내면에서 여전히 풀리지 않은 감정들이 빈 병에 담겨 있는 셈이다.
"붉은 자줏빛으로
모과처럼 묵직한 무게로
짙은 향내음을 내뿜는 자스민
때로는 영광스러운 월계수
한련화 꽃잎처럼 매운 날로도
박하향처럼 짜릿함으로도
괭이풀처럼 시큼한 날로도"
이 부분에서는 여러 가지 꽃과 그 향기를 통해 인생의 다양한 순간들을 묘사한다. '붉은 자줏빛', '모과처럼 묵직한 무게', '자스민' 등은 각각 삶의 깊이와 향기를 상징하며, 다양한 감정의 층위와 그 강도를 나타낸다. '매운 날', '짜릿함', '시큼한 날'은 일상의 다양한 감정과 기억들을 상징한다. 이 모든 꽃들은 빈 병 안에서 한데 어우러지며 시인의 내면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시인은 이처럼 풍부하고 감각적인 묘사를 통해 독자에게 자신의 내면을 시각적으로 전달하고자 한다. 각 꽃들이 가진 색과 향은 인생의 다양한 측면을 상징하며, 이로써 시의 감각적 이미지가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다.
"낡은 일기장을 펼치고
하얀 광목천에 오색실로 수를 놓아본다"
'낡은 일기장'은 시인의 지나온 삶의 기록을 의미하며, '하얀 광목천에 오색실로 수를 놓는다'는 표현은 과거의 기억들을 바탕으로 새로운 인생의 장을 만들어가는 행위를 상징한다. 이는 시인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과거의 경험들을 바탕으로 미래를 설계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오색실은 다채로운 인생의 경험과 감정을 나타내며, 그 경험들을 엮어 하나의 아름다운 삶의 작품으로 만들어가려는 시인의 철학이 엿보인다.
"빨간 장미꽃은 님이 보내신 사랑의 꽃
노란 해바라기는 목표를 맴도는 꽃
분홍빛 봉숭아꽃은 벗들과 손톱에 물들이며
첫사랑이 이루어지길 기원하던 꽃
커다란 자색목단은 양기를 북돋아줄 영양제"
여기서는 각 꽃이 상징하는 의미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빨간 장미는 사랑의 상징으로, 노란 해바라기는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삶의 모습을, 분홍빛 봉숭아는 순수하고 아련한 첫사랑의 기억을 나타낸다. 자색목단은 삶의 활력을 의미하며, 시인은 이 다양한 꽃들을 통해 인생의 여러 가지 양상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이는 시인이 인생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그 안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일기장을 덮고 다시 빈 병을 응시한다. 남은 생에 수를 놓을 꽃들을 생각하며"
마지막 구절에서는 '일기장을 덮고 빈 병을 응시한다'는 시인의 태도를 통해 다시금 자기 성찰의 순간을 강조한다. 남은 생애에 무엇을 채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으며, 빈 병은 여전히 무언가를 담아낼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이다. 시인은 미래에 채워질 수많은 꽃들을 생각하며, 자신의 삶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갈 의지를 다지고 있다.
배선희 시인의 '빈 병'은 일상의 사물에서 출발해 삶의 본질을 탐구하는 철학적 시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빈 병이라는 상징을 통해 시인은 삶의 공허함과 동시에 그 안을 채우려는 인간의 욕망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시 전체에서 감각적인 이미지와 색채가 풍부하게 사용되었으며, 다양한 꽃과 그들의 상징적 의미를 통해 삶의 다층적인 면모를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시인은 일상의 평범한 사물에서도 큰 의미를 발견하는 감수성을 지녔으며, 이러한 점이 그의 시적 세계를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이 시는 독창적인 표현을 통해 인간 존재의 복잡성과 그 아름다움을 탐구하고 있다.
시인은 삶을 하나의 수놓기 작업으로 비유하며, 과거의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미래를 새롭게 채워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러한 시인의 접근 방식은 삶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들며,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빈 병'은 단순한 공허함이 아닌, 그 안을 채울 무한한 가능성으로 독자에게 다가가며, 시인의 삶과 철학을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