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Sep 11. 2024
배선희 시인의 '장승'을 청람 평하다
배선희 시인과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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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
시인 배선희
탈춤을 신명나게 추면서 장승을 깎는
은빛 머리카락 휘날리며 살아있는 장승
장승이 장승을 깎는 명인이다
동구 밖에 우뚝 서서
마을의 잡귀나 질병 지켜주는
촌락 수호신의 형상
인간들 소망도 많아 각양각색이다
눈을 부릅뜨고, 주먹만 한 코에
귀밑까지 찢어진 입은. 함께 웃을밖에
석장승은 수명장수할 터인데
그가 깎은 목장승은 생로병사가 완연하여
늙고, 죽음을 보여주는 것은
살아있는 자신의 모습인가
2.
살아있는 장승은 하회별신굿에서
파계승 탈을 쓰면 영락없는 광대다
분내의 오줌 냄새를 맡고
그 욕정 참지 못해 오줌이 묻어있는
모래를 확 뿌리는데, 얼쑤
장승인 까닭에 그 춤사위 탁월하다
그 많은 탈 중에서
파계승破戒僧 탈을 쓴 것은
파계 장승인 탓일까?
그의 장승은 격이 없다
파격적인 손놀림으로 태어나는 장승들
놀라워라. 틀에 박힌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은 아니어도
감정을 발산하는 뚜렷한 표정으로
장승의 탈을 벗고 뛰쳐나온다
그는 나무를 깎고 다듬는 게 아니다
나무를 파헤쳐 그 속에 숨어있는
장승을 밖으로 꺼내는 작위作爲
나무마다 목신이 있음을 보여주는
아, 심장이 살아있는 장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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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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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선희 시인은 자신의 삶과 예술적 경험을 통해 한국 전통문화와 민속을 현대적인 시각에서 재해석하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시는 민속적 소재를 통해 인간의 삶과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특징을 지닌다.
시 "장승"에서도 이러한 특성이 잘 드러나 있다.
시는 전통적인 장승을 현대적 의미로 새롭게 풀어내며, 인간의 욕망, 생로병사, 그리고 예술적 자유를 장승의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 시는 전통과 현대를 넘나드는 경계를 탐구하며, 장승의 이미지를 통해 인간 내면의 심리를 파고드는 예술적 성찰을 제시하고 있다.
"탈춤을 신명나게 추면서 장승을 깎는 / 은빛 머리카락 휘날리며 살아있는 장승 / 장승이 장승을 깎는 명인이다"
첫 번째 연에서는 장승을 깎는 명인이 등장한다. 이 명인은 탈춤을 추며 은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는데, 이 모습은 매우 역동적이고 생동감 있다. 장승이 단순한 조각품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로써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장승이 장승을 깎는다'는 표현은 예술가가 자신을 창조하는 행위를 은유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예술 창작의 과정과 자기 성찰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 이때, 장승은 단순히 외부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스스로 만들어지는 존재로서 그려진다.
"동구 밖에 우뚝 서서 / 마을의 잡귀나 질병 지켜주는 / 촌락 수호신의 형상 / 인간들 소망도 많아 각양각색이다"
이 부분에서는 장승이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고 있음을 묘사한다. 장승은 인간의 다양한 소망을 담고 있는 존재로 그려지며, 여기서 장승은 인간의 희로애락과 소망의 투영체로 작용한다. ‘각양각색이다’라는 표현은 장승이 단일한 형태나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인간의 욕망과 소망을 반영하는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존재임을 강조한다.
"눈을 부릅뜨고, 주먹만 한 코에 / 귀밑까지 찢어진 입은. 함께 웃을 밖에"
이 부분에서는 장승의 외형적 특징을 묘사하고 있다. 장승의 생동감 있는 표현을 통해 그가 단순히 돌이나 나무로 만든 조각이 아니라, 감정과 생명을 지닌 존재임을 강조한다. ‘함께 웃을밖에’라는 문구는 장승의 특이한 표정 속에 담긴 해학과 유머를 드러내며, 이러한 해학은 한국 전통 예술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고 있다.
"석장승은 수명장수할 터인데 / 그가 깎은 목장승은 생로병사가 완연하여 / 늙고, 죽음을 보여주는 것은 / 살아있는 자신의 모습인가"
이 연에서는 장승의 물질적 속성에 따른 생명의 한계를 이야기한다. 석장승은 수명과 장수를 상징하는 반면, 목장승은 생로병사의 과정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는 장승이 곧 인간의 삶을 비유하는 상징으로 작용하는데, 특히 ‘살아있는 자신의 모습인가’라는 표현은 작가가 자신을 투영한 결과물로서 장승을 바라보는 시각을 암시한다.
"살아있는 장승은 하회별신굿에서 / 파계승 탈을 쓰면 영락없는 광대다"
여기서 장승은 하회별신굿의 ‘파계승 탈’을 쓴 광대와 같은 존재로 묘사된다. 파계승 탈은 욕망과 인간 본능을 상징하는데, 이러한 이미지를 통해 장승 역시 인간적 욕망을 담고 있는 존재로 확장된다. 장승이 단순한 수호신이 아닌, 인간의 다양한 본성을 포함한 존재로 묘사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분내의 오줌 냄새를 맡고 / 그 욕정 참지 못해 오줌이 묻어있는 / 모래를 확 뿌리는데, 얼쑤 / 장승인 까닭에 그 춤사위 탁월하다"
이 구절은 장승의 신명 나고 자유로운 성격을 묘사하며,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표현한다. ‘얼쑤’라는 감탄사는 한국 전통 민속 예술의 흥을 표현하는 전형적인 표현으로, 장승의 본능적이고 야성적인 매력을 한층 강조한다.
"그 많은 탈 중에서 / 파계승 탈을 쓴 것은 / 파계 장승인 탓일까? / 그의 장승은 격이 없다"
여기서는 장승의 파격성과 자유로움을 나타내고 있다. 장승이 고정된 틀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형태와 표현을 통해 창조되는 과정을 묘사하며, 이는 예술의 자유로운 본질을 나타낸다. '격이 없다'는 표현은 전통적 규범에서 벗어난 예술의 개방성과 혁신성을 상징한다.
"놀라워라. 틀에 박힌 /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은 아니어도 / 감정을 발산하는 뚜렷한 표정으로 / 장승의 탈을 벗고 뛰쳐나온다"
이 구절에서는 전통적 장승의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새로운 표현 양식을 보여주는 장승을 묘사한다. 이는 예술의 해방과 창의성을 나타내며, 장승의 탈을 벗고 나오는 것은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예술 창작의 과정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는 나무를 깎고 다듬는 게 아니다 / 나무를 파헤쳐 그 속에 숨어있는 / 장승을 밖으로 꺼내는 작위 / 나무마다 목신이 있음을 보여주는 / 아, 심장이 살아있는 장승"
마지막 연에서는 예술가의 역할을 재해석하고 있다. 예술가는 단순히 형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을 발견하고 드러내는 자로서 표현된다. ‘심장이 살아있는 장승’이라는 표현은 장승을 살아 숨 쉬는 존재로 만들어내는 예술가의 심오한 창조적 정신을 상징한다.
배선희 시인의 시 "장승"은 장승이라는 전통적인 소재를 통해 인간의 본질과 예술의 본질을 탐구하는 작품이다.
시는 장승의 형상과 그 속에 담긴 다층적인 의미를 섬세하게 풀어내며, 장승이 단순한 수호신이나 조각품이 아닌, 생명과 욕망을 지닌 존재로 재탄생하게 만든다.
이를 통해 시인은 전통과 현대를 넘나드는 예술적 감각을 보여주며, 장승을 매개로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통찰력을 발휘한다.
배선희 시인의 시는 예술이 단순히 외형적 재현을 넘어,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고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담아내는 과정임을 강렬하게 제시한다.
이 작품은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시인의 예술 철학을 명확하게 드러내며, 깊이 있는 감성적 울림을 준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