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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바다

노유정 시인과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보리 바다



시인 노유정






언제부턴가 나는 눈이 시리도록 옥빛 물결 위에서 슬퍼도 슬프지 않은 척
애써 눈물 감추고 있다
청상靑孀의 어머니가 혹한으로 길러낸 남매 그 인고의 발자취 더듬으며

외갓집 앞
옥빛의 보리밭은 바람이 불 때마다 바다의 물결같이 유연하게 춤추었다 악동들은 그 보리밭을 보리 바다라 이름 붙였다

청명한 5월 현해탄 출렁이는 파도를 타며
가없는 어머니 사랑에 겹쳐지는 환영幻影

가끔 어머니가 꺾어 불렸던 보리피리 노래 그 애달픈 음률音律 따라 내 영혼은 어머니의 하얀 무명 저고리 그 다스한 가슴에 파묻히려
그리움의 춤사위 보리 바다로 달려간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노유정 시인은 한국 문단에서 독특한 목소리로 자리매김한 중견 작가이다. 그의 시는 대개 가족과의 추억, 자연의 이미지, 그리고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노유정 시인의 시적 세계는 주로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고,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상처와 회복의 서사를 담아내는 데 집중한다.
특히 그녀의 작품은 인간이 경험하는 슬픔과 고통 속에서도 그 안에 존재하는 작은 기쁨과 희망의 빛을 포착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노유정 시인은 고통을 미화하거나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 내재된 인간의 본질적 가치를 탐색한다.

"보리 바다" 역시 이러한 시인의 문학적 철학이 잘 드러난 작품으로, 그 속에 담긴 자연의 이미지와 가족에 대한 애정이 고스란히 표현되어 있다.

첫 행에서 "언제부턴가 나는 눈이 시리도록 옥빛 물결 위에서 슬퍼도 슬프지 않은 척 애써 눈물 감추고 있다"는 표현은 시인의 내면적 갈등과 정서적 억압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여기서 ‘옥빛 물결’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동시에, 그 위에서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가는 화자의 내면을 반영한다. 시인은 슬프지만 슬프지 않은 척하는 모습을 통해, 현실과 감정 사이의 괴리감을 표현하고 있다. 이는 인간이 살아가며 감당해야 하는 여러 감정적 부담을 암시하며, 억눌린 감정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로 사용된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청상靑孀의 어머니가 혹한으로 길러낸 남매 그 인고의 발자취 더듬으며"라는 표현은 시인의 어머니에 대한 회상을 드러낸다. 여기서 ‘청상靑孀의 어머니’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자식을 길러낸 강인한 존재로 묘사되며, 시적 화자는 그 어머니의 인고의 세월을 떠올리며 감정의 깊이를 더한다. ‘혹한으로 길러낸 남매’라는 표현은 고난 속에서도 사랑을 잃지 않은 가족의 모습을 상징하며, 시인의 생애와 가치관을 반영한다.

"외갓집 앞 옥빛의 보리밭은 바람이 불 때마다 바다의 물결같이 유연하게 춤추었다"라는 행에서는
보리밭의 이미지가 마치 바다처럼 묘사된다. 이 대목에서 보리밭의 이미지는 단순한 농촌의 풍경을 넘어서, 자연과 인간의 감정을 연결하는 매개체로 작용한다. 바람에 춤추는 보리밭은 시적 화자의 기억 속에서 마치 생명력을 가진 듯한 존재로 형상화되며, 이는 시인의 자연에 대한 깊은 애정을 반영한다.

"악동들은 그 보리밭을 보리 바다라 이름 붙였다"라는 구절은 어린 시절의 순수함과 상상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악동들’은 그저 장난스러운 아이들이지만, 그들의 명명 행위는 자연에 대한 친밀한 감각을 반영하며, 동시에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이처럼 단순한 표현을 통해 시인은 어린 시절의 순수한 감정과 기억을 소환하며, 자연의 이미지를 더욱 생생하게 그려낸다.

"청명한 5월 현해탄 출렁이는 파도를 타며 가없는 어머니 사랑에 겹쳐지는 환영幻影"이라는 대목에서는 시적 화자가 느끼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환영처럼 겹쳐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현해탄의 파도는 어머니의 사랑과 동일시되며, 그 파도 속에서 화자는 어머니의 존재를 느낀다. 이는 자연의 이미지와 인간의 감정을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시인의 능력을 보여주며, 어머니에 대한 깊은 애정과 그리움을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가끔 어머니가 꺾어 불렸던 보리피리 노래 그 애달픈 음률音律 따라 내 영혼은 어머니의 하얀 무명 저고리 그 다스한 가슴에 파묻히려"라는 구절은 시적 화자의 내면적 욕망과 그리움을 드러낸다. 보리피리의 음률은 어린 시절 어머니와의 추억을 상기시키며, 그 애달픔 속에서 시적 화자는 어머니의 가슴에 파묻히려는 욕망을 드러낸다. 이는 시인의 섬세한 감정 묘사를 통해 독자의 감정을 자극하며, 어머니와의 유대감을 더욱 깊게 느끼게 한다.

마지막으로 "그리움의 춤사위 보리 바다로 달려간다"라는 표현은 화자가 그리움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보리 바다로 달려가는 모습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보리 바다는 단순한 자연의 공간을 넘어, 시적 화자가 감정을 해소할 수 있는 치유의 공간으로 해석된다. 이 대목은 시적 화자의 내적 갈등과 해소의 과정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며, 시의 결말을 감동적으로 마무리한다.

이 시의 감성적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연과 인간의 감정이 서로 결합되어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를 이룬다는 점이다.
노유정 시인은 이러한 자연의 이미지를 통해 인간의 내면적 갈등과 상처를 섬세하게 드러내며, 이를 치유하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시의 전반적인 흐름에서 드러나는 시인의 가치 철학은 인간의 슬픔과 그리움을 자연의 순환과 결부시켜 치유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데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보리 바다"는 노유정 시인의 시적 세계를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그녀의 문학적 깊이와 섬세함을 확인할 수 있다.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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