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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조 교수의 '산소, 탄소 통조림'을 김왕식 평하다

김유조 교수와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산소, 탄소 통조림




* 김유조 교수




통조림을 알게 된 것은 우리 세대가 대략 그렇듯이 유년시절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깡통 덕분이었다. 맛보기조차도 힘든 쇠고기는 물론이고 알지도 못하 던 과일까지 미제깡통을 통하여서 접하게 된 경험은 경이적이었다. 깡통체험은 솔직히 말하자면 꿀꿀이죽과도 연결되는 부분이 있어서 깊이 추억하기에는 다소 민망하다. 깡통이 캔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안 것은 조금 더 상급학년이 된 후였으리라.

통조림의 역사는 19세기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전쟁을 수행하며 원정길에 나선 병사들의 식사 문제 해결을 위한 병조림으로 본격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후 교통수단의 발전에 따른 장거리 운송 시대가 열리면서 통조림 산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고 가난한 전쟁국가였던 우리에게도 그 효과가 파급되었다고나 할까. 미군부대에서 나온 통조림을 접한 초기에는 깡통 자체도 너무나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어서 내용물을 먹고 나서도 빈 깡통은 요긴한 집안의 가구 대체재였다고 하면 요즘 젊은이들은 믿기나 할까. 사실 오늘날은 이 깡통이 너무나 흔하게 되어서 그 많은 깡통을 만드느라고 투입된 재료 예컨대 금속과 플라스틱은 자원 소모와 폐기물 문제를 야기하고 제조에 필요한 에너지가 유발하는 탄소의 배출 역시 인류의 문명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고 있는 실정이기도 하다.
경제 발전과 함께 나 스스로도 깡통문화를 향유하는 일원이 되어있던 때에 ‘산소 통조림’을 판매한다는 광고를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네팔의 산소를 담은 캔’이라느니 어느 ‘유명 해안의 바다 산소’를 통조림으로 만들어서 판다는, 어찌 보면 봉이 김선달 대동강 물 팔아먹던 이야기가 아닌가. 궁금하여서 가만히 광고를 들여다보니 이름난 산이나 바다에서 산소를 포집한 것은 아니고 아마도 산소발생기에서 농축 산소를 받아 넣었거나 아니면 소형 산소발생기가 장치된 깡통인 모양이었다. 산소를 들이마실 때에는 플라스틱이나 비닐 장치를 통하여서 쉽사리 산소를 흡입할 수 있다는 그림이 많은 것을 설명해 주기도 하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날 도시에서는 공기의 20%에도 못 미치는 산소를 제대로 흡입하기도 쉽지 않아서 하루 2만 번 정도를 숨 쉰다는 인간이 깡통 속의 산소를 보조받아야 건강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되다니.

예전 가난하고 전쟁 중이던 때에 삼시 세끼를 제대로 먹지 못하여서 가끔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깡통 레이션으로 굶주림을 해결하던 때와 달리 이제는 깡통 산소를 비싸게 사서 보충해야 한다는 세태가 참으로 아이러니일 수밖에 없다.
우리 세대의 식목에 대한 추억과 관심은 남다른 바가 있다. 땔감이나 취사를 위하여서 앞뒤의 산에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나무를 해오지 않으면 생활이 되지 않던 처지에 어느 날 갑자기 입산과 벌목에 금족령이 내리고 봄이면 식목일 전후로 학교 수업도 전폐하고 나무를 심어야 하게 된 것이다. 산에만 나무를 심는 게 하니라 말라빠진 하천 둑 방과 사방사업을 한 저수지 옆구리에도 무언가 나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라면 모두 갖다 심어야 학교생활이 완수되는 판이었다. 묘목이래야 별게 없었다. 기억나는 것으로는 오리나무 정도면 준수하였고 주로 아카시와 심지어 버드나무도 가지를 뚝뚝 잘라서 꺾꽂이를 하는 형편이었다. 처음에는 한 여름의 한발 탓에 모두 말라죽기도 했고 어떤 해에는 큰 물이 져서 겨우 뿌리내린 묘목들을 몽땅 쓸어가 버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역경 속에서도 어느 틈엔가 민둥산은 신통하게도 푸르게 모습을 바꾸었고 제방에 심은 나무들은 홍수 때에 위험하다고 오히려 베어내는 경우도 보았다. 경부 고속도로를 낸다고 야산 자락의 이름 모를 나무들을 베어내는 것을 본 것까지가 나무를 잘라내는 경우의 전부였다. 그렇게 피땀 흘려 심고 가꾼 나무를 밀어내다니, 우선 감정과 정서가 견뎌낼 재간이 없었다. 신문과 방송의 흐름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런 뉴스의 하이라이트 타임은 바야흐로 식목일 전후였다. 이때 마침 산림청 내의 산림문학회에서 국내문학인들에게 식목행사 초대가 왔다.

그전 몇 해 동안에도 산림문학회의 식목초대행사에 참여한 바는 있었는데 그때까지는 빈 땅이거나 산불이 난 지역의 녹화사업 비슷한 경우였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기존의 나무를 베어내고 새로운 수종을 심는 혁신적 행사로서 산림의 수종개량과 ‘탄소 통조림’을 대대적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바야흐로 탄소 통조림의 시대가 나에게도 알려지고 전개되는 순간이었다. 내가 시대에 한 발 늦었지만 사실 유명 언론에서도 이런 시대적 추이를 모르고 산림벌채를 신랄하게 규탄하였다는 생각에 조금 자위와 변명의 여지는 생겼다고나 할까. 산림청 조림 담당관과 열정 어린 당시 산림청장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을 요약할 수 있었다.

전 세계적인 기후변화의 해법으로는 역시 나무만 한 게 없다.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33%인 26억 t가량이 산림에 흡수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철근이나 콘크리트를 나무로 대체하는 것은 효과적인 이산화탄소 감축방법이다. 철근과 콘크리트는 제조 과정에서 화석연료를 사용해 이산화탄소가 배출되지만 나무는 오히려 이산화탄소를 머금고 있기 때문이다. 곳곳에 설치된 ‘탄소 통조림’에 이산화탄소를 축적하는 시스템이 조성되는 셈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식목과 산림정책은 일단 많은 나무를 심어서 치산치수의 기본을 닦은 것이라면 이제는 탄소를 많이 포집하고 산소를 많이 내뿜는 신수종의 나무로 대치하고 지금껏 심은 나무들은 차차 베어내서 유용한 자원으로 사용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무는 탄소를 포집하는 통조림이고 우리는 그런 나무를 통조림統造林한 셈이었다. 그날 우리가 심은 나무는 신수종 백합나무였다. 산소나무이자 탄소 통조림의 대표적인 나무라고 한다. 우연의 일치인가, 학습의 효과인가, 그날 이후 나무를 베어내고 새로 식목을 하는 일에 큰일 난 듯 호들갑을 떠는 언론은 찾을 수가 없었다.



*
김유조 교수


건국대 명예교수(부총장 역임),

국제 PEN 한국본부 부이사장,

미국소설학회 헤밍웨이 학회

경맥문학회

서초문인협회 회장 역임,

문학의식 공동대표,

여행문화 주간,


학술원 우수도서상

헤밍웨이 문학상,

문학마을 문학대상

서초문학상

김태길 수필문학상 등 수상,


장편

반포사람들,

소설집

세종대왕 밀릉 등 다수,


시집

여행자의 잠언 등,


수필집

열두 달 풍경 외,


평론집

번역서 학술 저서 다수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김유조 작가의 "산소, 탄소 통조림"은 통조림을 통한 사회적 변화와 환경 문제를 비유적이고 비판적으로 다루는 글이다. 작가는 통조림이라는 소재를 통해 시대의 변화를 관찰하고, 인간의 욕망과 환경 파괴의 역설적 관계를 탐구한다.

글의 시작은 작가의 유년 시절의 경험으로 돌아가,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통조림과 그로 인해 얻게 된 새로운 식품 경험을 이야기한다. 당시 통조림은 부족한 자원의 대체물로서 귀중한 가치를 지녔으며, 심지어 꿀꿀이죽과 연결되는 민망한 기억도 있지만 그 시절의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현실을 담아내고 있다. 이러한 통조림의 역사는 19세기 나폴레옹 전쟁 시기의 병조림에서 시작되어, 이후 장거리 운송 시대와 전쟁국가의 경제 상황 속에서 중요한 식량 공급 수단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현재의 통조림은 자원 소모와 폐기물 문제, 제조 과정에서의 탄소 배출 등 환경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작가는 '산소 통조림'이라는 현대의 새로운 상품을 보고 놀라움을 느낀다. 이는 실제로 네팔의 산소나 해안의 바다 산소를 담은 것이 아니라, 산소발생기에서 만들어진 농축 산소를 통조림 형태로 판매하는 상술을 이야기하는데, 이러한 상품의 등장은 오염된 도시 환경에서 제대로 된 산소를 흡입하기 어려워진 현대인의 아이러니를 드러낸다. 이는 과거의 전쟁 시기와 대비되어 현재의 환경적 퇴보를 비판하는 시각을 제공한다.

글은 과거의 식목일 경험으로 넘어가며, 가난했던 시절 나무를 심고 가꾸던 기억을 회상한다. 당시에는 생활의 일부였던 나무 심기가 지금은 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중요한 대안으로 변모한 것이다.
글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최근의 산림 정책 변화에 주목한다. 산림청의 새로운 산림 정책은 기존 나무를 베어내고 탄소를 많이 포집하고 산소를 많이 배출하는 신수종으로 교체하는 것, 즉 '탄소 통조림'을 대대적으로 하려는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변화가 현대의 시대적 추이推移를 반영한다고 보면서도, 초기에는 나무를 베어내는 것에 대한 강한 감정적 반발을 드러낸다.
산림청 담당자의 설명을 통해, 이는 탄소 포집炭素捕執과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전략적 접근임을 이해하게 된다. 철근이나 콘크리트를 나무로 대체하는 것이 효과적인 이산화탄소 감축 방법이라는 설명은 나무가 단순한 자연물 이상의 가치, 즉 '탄소 통조림'으로서의 역할을 강조한다. 이는 현대 환경 문제의 해법으로서 나무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게 만드는 요소이다.

결국, 작가는 나무를 '탄소 통조림'으로 보는 새로운 관점에 동의하며, 그날 심었던 백합나무가 이러한 '탄소 통조림'의 대표적인 예임을 깨닫는다. 이후 나무를 베어내는 행위에 대한 언론의 과도한 비판이 줄어든 것도 이와 같은 인식 전환의 결과라고 지적한다.

글은 통조림이라는 친숙한 일상의 소재를 통해 독자가 쉽게 접할 수 있는 문제로 끌어내면서도, 그 속에서 복잡한 사회적, 환경적 이슈를 명확하게 풀어낸다.
특히, 과거와 현재의 대조를 통해 인류의 발전과 퇴보를 동시에 비판하는 작가의 통찰력은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또한, 산림 정책의 변화와 같은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현대 사회의 환경적 문제와 대안을 제시하며, 통조림의 상징성을 확장하여 인간 문명과 환경의 관계를 성찰하게 만든다.
이처럼 김유조 교수의 글은 통조림이라는 소재를 통해 인간의 욕망과 환경 파괴의 역설적 逆說的관계를 깊이 있게 탐구하고, 독자에게 현대 문명의 방향성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김유조 교수님께 올립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저는 오래전부터 교수님께서 건국대 부총장님으로 재직하실 때부터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교수님의 수필 "산소, 탄소 통조림"을 읽고 깊은 감동과 함께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겼습니다. 저는 일상 속에서 지나치기 쉬운 문제들을 다시금 돌아보게 하는 교수님의 통찰력에 큰 인상을 받았습니다.

특히, 통조림이라는 친숙한 소재를 통해 현대 문명과 환경의 문제를 깊이 있게 성찰하시는 글에서 많은 배움을 얻었습니다.

이에 몇 가지 느낀 바를 조심스레 적어봅니다.

우선, 교수님께서 어린 시절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통조림을 통해 새로운 맛과 문화를 경험하셨다는 이야기는, 통조림이 단순한 식품 보관 용기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저 역시 어릴 적 통조림이 귀한 대접을 받던 시절의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 통조림은 경제적 궁핍을 상징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전혀 맛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로 가는 창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통조림이 오늘날에는 그 가치가 변하고, 심지어는 '산소 통조림'처럼 새로운 상업적 형태로까지 등장하는 모습은 시대의 변화를 대변한다고 생각합니다.

교수님께서 지적하셨듯이,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아이러니이자 현대인의 삶의 조건이 얼마나 복잡해졌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산소 통조림'에 대한 교수님의 언급은 저에게 강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상업적 상술을 넘어서, 오염된 도시 환경과 대기 질 악화로 인해 사람들이 이제는 "신선한 산소"를 구매해야 하는 시대적 상황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 물을 팔았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는데, 그때는 유머로 들렸던 이야기가 오늘날에는 현실로 다가오니 참으로 씁쓸할 따름입니다.

교수님께서 과거의 가난한 시절에 삼시 세끼를 제대로 먹지 못해 미군부대의 통조림으로 연명하던 시절과, 이제는 돈을 주고 산소를 보충해야 하는 현재의 상황을 비교하며 말씀하신 대목은, 읽는 이로 우리 사회가 얼마나 급격히 변화해 왔는지를 성찰하게 합니다.

또한, 수필에서 과거 식목일의 경험을 회상하신 부분은 저에게 매우 감명 깊었습니다. 교수님께서 묘사하신, 앞뒤 산에서 나무를 해오고, 나무를 심고 가꾸던 그 시절의 모습은 자연과 인간이 상호작용하던 소중한 순간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한편으로는, 당시의 나무 심기가 오늘날에는 환경 문제 해결을 위한 주요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나무가 이제 단순히 산림을 조성하는 것을 넘어서, 기후 변화와 대기 오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탄소 통조림'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에서, 교수님께서 제기하신 관점이 매우 신선하고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교수님께서 언급하신 산림청의 새로운 산림 정책에 관한 이야기는 현대 환경 정책의 변화 방향을 잘 보여줍니다. 나무를 심고 가꾸는 일이 단순히 환경 미화를 넘어, 기후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수단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점에서, 교수님께서 강조하신 '탄소 통조림'이라는 개념은 매우 설득력 있게 다가왔습니다. 이는 또한 철근이나 콘크리트를 나무로 대체함으로써 이산화탄소 감축에 기여할 수 있다는 구체적인 설명을 통해 더욱 현실감 있게 느껴졌습니다. 나무가 오히려 이산화탄소를 흡수하여 머금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나무와 산림을 대하는 태도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교수님의 주장을 뒷받침해 줍니다.

이와 같은 교수님의 논지를 통해, 저는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작은 것들—이를테면 통조림처럼—이 얼마나 큰 사회적, 환경적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현대의 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단순히 과거의 방식을 고수하기보다는, 새로운 시각과 혁신적인 접근을 통해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는 점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끝으로, 교수님께서 이 수필을 통해 던지신 중요한 질문에 대해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수필을 통해 전달된 교수님의 깊은 통찰과 지성은, 우리 모두가 당면한 환경 문제와 그 해법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동시에, 우리 각자가 어떠한 자세로 미래를 맞이해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앞으로도 교수님의 지혜로운 글을 통해 많은 배움과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하며, 항상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독자 올림.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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