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자효 시인과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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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시인 유자효
나이 쉰이 되어도
어린 시절 부끄러운 기억으로
잠 못 이루고
철들 때를 기다리지 않고 떠나버린
어머니, 아버지.
아들을 기다리며
서성이는 깊은 밤.
반백의 머리를 쓰다듬는
부드러운 달빛의 손길.
모든 것을 용서하는 넉넉한 얼굴.
아, 추석이구나.
□ 유자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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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효 시인의 시 '추석'을 읽고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유자효 시인은 자신의 삶의 경험과 내면의 성찰을 바탕으로 감성적인 시 세계를 구축한 원로 시인이다.
그의 시는 일상 속에서 발견한 깊은 사유와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담고 있다. 그는 어린 시절의 기억, 부모에 대한 그리움, 삶의 부조리함 등 다양한 주제를 시어로 풀어내며, 특히 인생의 덧없음과 시간의 흐름에 대한 성찰을 작품 속에 녹여낸다.
시인 유자효는 추억과 그리움, 그리고 현재를 연결하며, 독자들에게 인간 본연의 감정과 인생의 깊이를 일깨우는 힘을 가지고 있다.
"나이 쉰이 되어도 어린 시절 부끄러운 기억으로 잠 못 이루고"
이 첫 번째 행은 시간이 흘러도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화자의 내면을 드러낸다. 나이 쉰이 되었다는 것은 인생의 절반을 넘긴 시점임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어린 시절의 부끄러운 기억이 여전히 화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는 것은, 과거의 경험이 현재의 자아에 얼마나 깊이 각인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과거의 상처와 그로 인한 트라우마가 시간이 지나도 쉽게 치유되지 않는 인간의 복잡한 심리를 나타낸다. 또한, 이 구절은 '잠 못 이루고'라는 표현을 통해 내면의 불안과 갈등을 감각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시인은 이렇게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을 자신의 시어로 잘 끌어내어 독자에게 공감을 이끌어낸다.
"철들 때를 기다리지 않고 떠나버린 어머니, 아버지."
이 행은 화자가 성숙해지기 전, 즉 '철들 때'를 기다리지 않고 떠나버린 부모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철들 때'는 단순히 나이를 먹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부모의 사랑과 희생을 온전히 이해하고 감사하는 시점을 의미한다.
부모가 떠난 후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소중함과 그들의 빈자리가 주는 깊은 상실감이 드러난다. '떠나버린'이라는 단어 선택은 부모의 죽음을 암시하며, 돌이킬 수 없는 상실에 대한 슬픔과 후회를 강조한다.
시인은 이러한 감정을 단순히 서술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상상과 감정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제시함으로써 더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아들을 기다리며 서성이는 깊은 밤."
세 번째 행은 시적 화자가 자신을 기다리던 부모의 마음을 되짚어보는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서성이는 깊은 밤'은 부모의 애타는 기다림과 불안감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부모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헌신을 나타내는 동시에, 이제는 그 사랑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화자의 성숙한 시선을 드러낸다. '깊은 밤'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시간적 배경을 넘어, 부모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묵직한 것이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이 구절을 통해 시인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감정의 무게를 지니고 있음을 강조한다.
"반백의 머리를 쓰다듬는 부드러운 달빛의 손길."
이 행은 시적 화자가 나이가 들어 백발이 된 자신의 모습을 그린다. '반백의 머리'는 세월의 흐름을 상징하며, 인생의 고난과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부드러운 달빛의 손길'은 자연의 위로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부모의 사랑과 비슷한 느낌을 전달한다. 이는 세월의 무상함을 초월하여 따뜻한 위로와 포근함을 주는 존재로서 달빛을 묘사하고 있다. 달빛은 화자에게 어머니의 손길처럼 다가와 모든 아픔과 상처를 어루만진다.
시인은 이러한 자연의 이미지를 통해 인간의 상처와 고통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모든 것을 용서하는 넉넉한 얼굴."
이 구절은 화자가 생각하는 부모의 얼굴을 형상화한 것이다. '모든 것을 용서하는'이라는 표현은 부모의 사랑이 얼마나 포용적이고 무조건적인지를 강조한다. 부모의 사랑은 자식의 잘못이나 실수를 다 감싸 안을 만큼 넉넉한 것이었다는 것을 시인은 이 짧은 한 문장으로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는 화자의 내면에서 부모에 대한 존경과 그리움이 얼마나 깊이 자리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시인은 여기서 부모의 얼굴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음으로써 독자가 자신의 기억 속 부모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여지를 남긴다.
"아, 추석이구나."
마지막 행은 추석이라는 명절이 주는 의미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추석은 가족이 모여 조상의 은혜를 기리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 시간이다.
이 시에서의 추석은 단순한 명절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부모의 부재 속에서 느끼는 깊은 그리움과 성찰이 추석이라는 배경과 맞물리면서 더 큰 울림을 준다.
시인은 '아, 추석이구나'라는 간결한 표현을 통해 그리움과 회한, 그리고 감사의 감정을 한꺼번에 녹여내고 있다.
유자효 시인의 시 "추석"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시간의 흐름 속에서 되새기며, 삶의 근원적인 질문과 성찰을 던지는 작품이다. 시인은 자신의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보편적인 인간 감정을 섬세하게 묘사하면서 독자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그의 시적 표현은 감성적이면서도 절제된 언어로 이루어져 있어, 더욱 강렬한 정서적 울림을 전한다. 부모의 사랑과 희생, 그리고 그리움이 한데 어우러진 이 시는 시간의 무상함과 인간의 본질적인 고독을 탐구하는 동시에, 결국엔 모든 것을 감싸 안는 따뜻한 사랑과 용서의 가치를 일깨워준다.
시인은 자연의 이미지를 통해 인생의 깊은 철학적 통찰을 담아내며, 독자들에게 삶의 본질에 대한 생각을 이끌어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렇듯 유자효의 "추석"은 인간과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담아낸 시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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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효 작가
1947년 9월 13일
방송인이자 시인으로 활동한 前 대학 교수이자 프리랜서 방송인이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국민학교(1960년)
경기도 인천중학교(1963년)
부산고등학교(1966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불어교육과 학사(197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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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출생인 그는 1974년 KBS 한국방송공사에 입사하여 기자로 근무하였다. 이후 1993년에 SBS 서울방송으로 직장을 옮긴 후 방송계 활동을 계속 이어나갔고, 2007년에는 한국방송기자클럽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2009년 SBS라디오 본부장 직위에서 사퇴한 이후 현재는 한국시인협회 심의위원장을 맡고 있다.
1968년 『신아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한 그는 시집으로 『성 수요일의 저녁』(1982), 『떠남』(1993), 『내 영혼은』(1994), 『지금은 슬퍼할 때』(1996), 『금지된 장난』(2002), 『아쉬움에 대하여』(2003), 『성자가 된 개』(2006), 『여행의 끝』(2007), 『전철을 타고 히말라야를 넘다』(2009) 등을 간행하였다. 이외에도 수필집으로 『세상의 다른 이름』(1997), 『다시 볼 수 없어 더욱 그립다』(2001)이 있다.
ㅡ 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