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Sep 29. 2024
1442 계단 ㅡ 허태기 시인
허택 시인과 청람 김왕식
■
1442 계단
시인 청강 허태기
민족의 성산
백두산 정상 오르는
서쪽 비탈길
운무를 뚫고 천지에 이르는
아스라한 하늘 길
1442 계단 넘어서면
천지가 열리는 곳
기어이 오르겠다는 각오로
첫 계단을 밟는다
갈수록 숨은 가파지고
다리는 무거워진다
잠시 쉬면서 호흡을 고른다
마음 다시 가다듬고
계단을 오른다
가다가 쉬면서 오르기를
반복한다
계단번호를 보니 절반도
못 미친다
먼저 온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것을 보고
격려와 다짐을 반복하면서
한 계단 한 계단 줄여간다
나무 한그루 없는
고산지대
가파른 능선에 키 작은
푸른 풀들 이름 모를 야생화가
황량함을 덜어 준다
백두산 높아도 하늘 아래
뫼이러니
쉬었다간 숨 고르고
오르고 또 오르니
마지막 돌계단에 1442라는
붉은 글씨가 희미하게 드러난다
이 계단 넘어서면 무엇이
있을까?
천지연 깊숙이 담긴 단군의
푸른 혼을
나는 볼 수 있을까?
짓궂은 운무로 아쉬움만
남길까?
떨리는 마음 딛고 몇 걸음
나아가자
환호와 탄성이 가슴을 때린다
활짝 갠 하늘 아래 천지가
드러난다
나는 보았노라!
저 푸른 천지연을~
나는 느꼈노라!
단군의 깊은 혼을~
■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ㅡ
청강 허태기 시인은 한 개인의 삶을 시어로 형상화하며 깊은 내면의 목소리와 자연을 연결짓는 독특한 문학적 시선을 지니고 있다. 특히 그의 시는 한반도의 자연 풍광과 민족적 정서를 결합해 한국인의 정신을 드러내는 데 탁월하다. "1442 계단"은 백두산을 오르는 체험을 통해 개인이 맞닥뜨리는 도전과 인내,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깨달음의 순간을 담아낸 작품이다. 시인은 백두산 오름의 과정을 삶의 여정으로 비유하며, 그 과정에서 얻는 심오한 성찰과 민족적 정체성을 감각적으로 그려낸다.
시의 첫 부분은 '민족의 성산'인 백두산에 오르는 여정의 시작을 묘사한다. "서쪽 비탈길 운무를 뚫고 천지에 이르는 아스라한 하늘 길"이라는 표현은 하늘과 맞닿아 있는 신성한 공간으로 안내하는 듯하다. '운무'는 가려진 신비와 장엄함을 동시에 내포하며, '천지'라는 말은 도달해야 할 이상적 세계를 암시한다. 이러한 묘사는 독자가 백두산의 웅장함과 성스러움을 직접 느낄 수 있도록 한다. 이는 민족의 숭고한 영혼을 깨닫고 그 정체성을 찾아가는 노정의 첫걸음을 상징하며, 백두산은 그 자체로 성스러움과 신비로움을 지니고 있다.
이어지는 행에서는 "1442 계단 넘어서면 천지가 열리는 곳"이라는 구절로 본격적인 여정의 어려움과 그 결과를 암시한다. '기어이 오르겠다는 각오로 첫 계단을 밟는다'는 문장은 높은 산에 오르는 결의와 인내를 드러낸다. 여기서 계단 하나하나는 인간의 노력을 상징하며, 그 계단을 밟는 순간마다 결심을 다지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시인은 자연과 인간의 도전적 관계를 드러내며, 고난을 극복해 나아가는 삶의 본질을 은유적으로 그린다.
'갈수록 숨은 가파지고 다리는 무거워진다'는 표현은 고난이 점차 심해지고 몸과 마음이 지치는 과정을 묘사한다. '잠시 쉬면서 호흡을 고른다'는 것은 인간이 도전 속에서도 잠시 멈추어 숨을 돌릴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 순간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재충전과 인내를 위한 과정이며, 고통을 견디고 다시 일어서기 위한 준비를 뜻한다. '마음 다시 가다듬고 계단을 오른다'는 것은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며 끊임없이 재도전하는 삶의 순환을 상징한다.
시인은 계단을 오르며 반복적으로 쉬고 나아가는 모습을 그려낸다. '가다가 쉬면서 오르기를 반복한다'는 표현은 시 전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는 인생의 여정에서 겪는 어려움과 시련 속에서도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자세를 보여준다. '계단번호를 보니 절반도 못 미친다'는 구절은 현실의 냉정함을 인정하지만, 시인은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로 다시 한 걸음씩 계단을 줄여가는 모습을 그린다. 이는 시련을 이겨내는 힘을 표현하며, 삶 속의 작은 노력들이 모여 결국에는 높은 곳에 도달하게 되는 과정을 은유한다.
나무 한 그루 없는 고산지대의 이미지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상황을 나타낸다. 하지만 '푸른 풀들 이름 모를 야생화가 황량함을 덜어 준다'는 것은 고난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움과 희망을 상징한다. 이 표현은 자연의 섬세한 아름다움과 생명력을 보여주며, 인생의 고통과 황량함 속에서도 피어나는 작은 기쁨과 희망을 느끼게 한다.
'백두산 높아도 하늘아래 뫼 이러니'는 백두산의 위대함에도 불구하고 자연의 일부일 뿐임을 깨닫는 구절이다. 이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철학적 시각을 담고 있다. 자연의 웅장함과 인간의 노력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음을 강조하며, 시인은 이 계단을 오르며 얻는 깨달음을 통해 삶의 깊은 이치를 성찰한다.
마지막 돌계단에서 '1442라는 붉은 글씨'를 확인하는 순간, 시인은 계단을 넘어서면 마주할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와 설렘을 드러낸다. 천지연에 담긴 단군의 푸른 혼을 보겠다는 염원과 그것이 이루어질지 모르는 불확실성에 대한 긴장감이 동시에 표현된다. 이는 시인의 강한 열망과 그 열망이 이뤄질 때의 희열을 암시하며, 그저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깨달음을 얻기 위한 의식적인 행위를 나타낸다.
마침내 '활짝 갠 하늘 아래 천지가 드러난다'는 표현은 모든 시련을 극복한 후 얻은 영광의 순간을 묘사한다. '나는 보았노라! 저 푸른 천지연을~ 나는 느꼈노라! 단군의 깊은 혼을~'라는 외침은 시인의 강렬한 감동과 환희를 드러낸다. 이는 개인의 경험이 민족의 역사와 연결되어 성취의 순간을 더 크게 느끼게 한다.
이 시는 인간의 삶의 노정과 극복의 과정을 백두산 등반이라는 행위로 형상화하며, 자연과 민족적 정신이 하나가 되는 숭고한 체험을 표현한다. 또한 시인의 언어는 섬세하면서도 담담하게 삶의 고난과 이를 이겨낸 성취를 묘사하며, 자연과 인생의 조화를 아름답게 그려낸다. 이는 한 개인의 노력과 인내를 통해 얻은 깨달음이 개인에 그치지 않고 민족의 역사와 영혼까지 확장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1442 계단"은 삶의 힘든 노정 속에서 멈추지 않고 끝까지 오르는 인간의 끈기와 노력,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만나는 깨달음과 기쁨을 노래한다. 산을 오르는 과정은 삶의 고난과 도전을 은유적으로 그리며, 시인은 이를 통해 백두산과 천지의 신비로움뿐만 아니라 인간의 끊임없는 열정과 그 과정에서 느끼는 성취감까지도 깊이 있게 표현하고 있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