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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은희 시인의 '무논의 달'을 청람 김왕식 평하다

유은희 시인과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무논의 달




시인 유은희






무논의 달을 멀리 흘려보내기 위해
밤중에 나와 물꼬를 트고 기다린 적 있지
물소리는 어둠의 구들을 흐르다
모로 잠든 이들의 귓바퀴를 휘돌아가고
어스름 논바닥은 드러났지
얼핏 물기 속으로 몸피를 줄여가며
논의 늑골을 찾아 스며드는 달을 보았지

몸의 물꼬를 트고 밤새 눈물을 흘려도
명치에 걸려 빠져나가지 않는 사람이 있을 줄
그땐 알지 못했지












문학평론가ㆍ시인 청람 김왕식





유은희 시인은 일상 속에서 존재의 내밀한 감정을 발견하는 시를 써왔다. 그는 자연과 인간의 상호작용을 세심히 관찰하며 개인의 내면적 성찰을 담는다.
특히 상실과 그리움을 다루는 그의 시에는 감정의 진폭이 은유적으로 담겨 있어 독자로 자신의 기억과 감정을 투영하게 한다.
시인의 삶 또한 이러한 주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삶 속에서 느꼈던 관계의 무게와 고독, 이를 자연의 이미지로 풀어내는 방식은 그가 추구하는 진정성의 시학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의 이러한 태도는 이 작품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무논의 달’은 자연과 인간 감정의 결합을 통해 고통과 회복의 길을 상징적으로 묘사한다.

“무논의 달을 멀리 흘려보내기 위해 / 밤중에 나와 물꼬를 트고 기다린 적 있지”

여기서 '무논의 달'은 시적 화자의 감정을 반영하는 상징이다. 달이 논 위에 뜬 장면은 외면하기 어려운 감정의 상처나 기억을 의미한다. 밤중에 물꼬를 트는 행위는 억눌린 감정을 해소하려는 시인의 내면적 갈망을 나타낸다. 기다림은 감정 해소의 시간적 지연을 암시하며, 고통의 해방이 즉각적이지 않음을 암시한다.

“물소리는 어둠의 구들을 흐르다 / 모로 잠든 이들의 귓바퀴를 휘돌아가고”

물소리는 감정의 흐름을 은유하며, 어둠 속에서 잠든 이들의 귓가를 맴도는 장면은 고독과 상실의 고통이 남모르게 퍼져나가는 과정을 그려낸다. 물소리가 직접 들리지 않더라도 화자는 그 여운을 느끼며 그 슬픔을 견디고 있다.

“어스름 논바닥은 드러났지 / 얼핏 물기 속으로 몸피를 줄여가며”

새벽 어스름에 드러난 논바닥은 억눌린 감정이 해소되는 순간을 암시한다. 물기 속으로 몸을 줄이는 모습은 자신을 최소화하며 상처와 마주하려는 화자의 태도를 보여준다. 이는 감정적 과부하 속에서 자기 통제와 수용의 의지를 표현하는 중요한 이미지다.

“논의 늑골을 찾아 스며드는 달을 보았지”

'논의 늑골'이라는 표현은 논바닥을 사람의 몸으로 의인화한 것으로, 자연과 인간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달이 늑골 사이로 스며든다는 것은 슬픔과 기억이 신체 깊숙이 스며드는 과정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는 감정이 피할 수 없는 삶의 일부로 자리 잡았음을 의미한다.

“몸의 물꼬를 트고 밤새 눈물을 흘려도 / 명치에 걸려 빠져나가지 않는 사람이 있을 줄 / 그땐 알지 못했지”

몸의 물꼬를 트고 흘리는 눈물은 억제된 감정의 표출이다. 그러나 명치에 걸린 사람은 그 감정의 근원이자 해결되지 않은 아픔을 나타낸다.
화자는 시간이 지나도 치유되지 않는 상실의 무게를 깨닫지 못했던 과거의 자신을 회고하며, 인간의 감정은 단순히 흘려보낼 수 없는 것임을 절감한다.

이 시는 감정의 흐름을 자연의 이미지에 은유적으로 투영하며, 물과 달의 이미지를 통해 슬픔의 해소와 내면적 성찰을 그린다. 논과 물소리, 달의 움직임은 단순한 자연 현상을 넘어 인간 감정의 복잡한 결을 담아낸다. 시인의 감각적 언어는 정서적 깊이를 더하며, 독자들로 감정의 층위를 섬세하게 느끼게 한다. 또한, 물소리와 명치에 걸린 슬픔은 감정이 단순히 시간에 흘러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몸에 새겨지는 흔적임을 깨닫게 한다.

유은희 시인은 이 시를 통해 감정과 기억이 시간과 함께 흘러가길 바라는 인간의 욕구와,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음을 깨닫는 인간의 한계를 보여준다.
그는 자연과 인간을 연결하며 감정이 단순한 주관적 체험이 아니라 우주적 흐름 속의 일부임을 설파한다.
이는 개인적 아픔을 자연의 순환 속에서 재해석하며, 상실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시는 단순한 슬픔의 기록을 넘어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한 탐구를 담고 있다. 물꼬를 트고자 하나 감정을 완전히 흘려보내지 못하는 한계, 그리고 그 속에서 발견되는 성장의 가능성은 시인의 긍정적 철학을 엿보게 한다.
이는 감정을 억누르는 대신 자연스럽게 흘려보내고, 남은 아픔까지도 삶의 일부로 수용하는 태도로 이어진다.

유은희 시인의 ‘무논의 달’은 슬픔과 상실을 자연의 이미지로 풀어내며 감정의 흐름을 깊이 있게 성찰한 시다.
이 시는 감정이 단순히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 남아 인간을 형성하는 요소임을 보여준다.
시인은 자연과 인간을 연결하며, 감정의 해소와 수용을 동시에 추구한다.
언어는 간결하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상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회복의 시작임을 시인은 암시하며,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감정의 진실과 마주하라고 제안한다.
이 시는 감정을 억제하지 않고 수용할 때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품고 있다.





ㅡ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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