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의 '서시'를 문학평론가 청람김왕식 평하다
노벨문학상 한강 시인과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Oct 13.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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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시
한강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때로는
당신을 등지려고도 했는지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
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
그 윤곽의 사이사이,
움푹 파인 눈두덩과 콧날의 능선을 따라
어리고
지워진 그늘과 빛을
오래 바라볼 거야.
떨리는 두 손을 얹을 거야.
거기,
당신의 뺨에,
얼룩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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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ㆍ시인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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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은 소설가이자 시인으로, 인간 내면의 고통과 상실, 존재의 의미를 집요하게 탐구해 왔다.
그녀의 작품은 상처와 회복, 소멸과 재생 같은 주제를 일관되게 다룬다. 이러한 주제의식은 한강이 경험한 개인적 상처와 시대적 고뇌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지닌 인간과 삶에 대한 깊은 사유는 고요하지만 심오한 문장으로 표현된다. 이 시 ‘서시’ 역시 작가가 인생의 본질적 질문과 대면하며 도달한 깨달음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특히, 운명과의 만남이라는 주제를 통해 삶의 수용과 해탈의 태도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라는 도입부는 삶의 근원적 사건과의 대면을 암시한다. 시적 화자는 운명이 자신에게 말을 걸어왔을 때 조용히 그를 끌어안겠다고 말한다.
여기서 운명은 두려움이 아닌 수용의 대상이다. 화자가 감정의 혼란이나 고요 중 어느 쪽에 이를지 모른다고 한 부분은 인간이 삶의 끝에서 예측할 수 없는 감정에 직면하게 됨을 의미한다. 이 연은 운명을 단순히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화자가 내면에서 포용하는 행위로 표현함으로써 삶과 죽음을 초월한 깊은 성찰을 보여준다.
“당신”이라는 지칭은 운명 혹은 삶 자체를 은유한다. 화자는 운명의 존재를 ‘가끔’ 느꼈다고 회상하지만, 그 부재의 순간에도 운명이 자신과 함께 있었음을 깨닫는다.
이는 인간의 경험 속에서 의식되지 않은 상태조차 운명과 연결된다는 깨달음을 드러낸다. 이 부분에서 시인은 인간이 경험하는 고독 속에도 보이지 않는 연대가 내재해 있음을 암시한다. 시의 문장은 짧지만 내면적 성찰이 촘촘히 배어 있어, 삶의 모든 순간을 수용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라는 구절은 시인의 사유가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는 순간을 상징한다. 화자가 느끼고 후회하고 집착한 모든 것이 이미 운명에게 알려져 있다는 인식은 깊은 위안을 준다.
이는 인간이 완벽하게 이해받을 수 없다는 근본적 고독을 넘어서는 화자의 해탈적 경지다. 시적 화자는 운명과의 소통이 언어 없이도 이루어질 수 있음을 시사하며, 언어의 무용함 속에서 더 진실한 이해가 가능하다는 역설을 제시한다.
운명이 ‘얼굴’을 드러내는 순간을 묘사한 부분은 시의 정점이다. 화자는 윤곽의 사이사이와 그림자, 빛을 오래 바라보고 손을 얹겠다고 한다.
여기서 운명의 얼굴은 그동안의 삶의 모든 경험을 집약한 상징으로 읽힌다. 특히 “얼룩진” 뺨에 손을 얹는 장면은 화자의 연민과 이해를 담고 있다. 이 연은 시인이 삶의 흔적과 상처를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하는 태도를 담아낸다.
화자가 삶의 모든 측면을 수용하는 행위는 운명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순간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 시는 담담한 어조로 인생의 깊이를 응시하며, 강렬한 감정 대신 고요한 수용의 감성을 전달한다. 단순하고 절제된 언어를 통해 삶의 본질에 다가가고자 한 시인의 시도는 이미지의 묘사에서 절정을 이룬다.
특히 얼굴의 윤곽과 빛, 그림자의 대비는 삶의 상처와 아름다움을 동시에 포착하는 시인의 섬세한 시선이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시 전반에 걸쳐 일관된 흐름을 유지하며, 독자에게 삶의 내밀한 의미를 묵상하게 만든다.
이 시는 삶과 운명, 고통과 수용이라는 주제를 유기적으로 엮으며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구한다. 시인이 운명을 끌어안고 자신의 후회와 집착을 내보이는 태도는 삶에 대한 깊은 애정을 드러낸다.
삶의 상처를 부정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는 태도에서 시인의 철학이 드러난다. 운명의 얼굴을 바라보는 화자의 모습은 곧 자신을 향한 이해와 화해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러한 태도는 독자에게 삶의 순간을 온전히 수용하는 법을 제시하며, 고통을 넘어선 평화와 화해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한강의 ‘서시’는 삶과 운명에 대한 사유를 담담하면서도 깊이 있게 그려낸 시다.
시인은 언어의 절제와 이미지의 유려함을 통해 독자에게 무언의 위안을 전한다. 각 연은 독립적인 의미를 지니면서도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삶의 모든 순간이 운명과 연관된다는 깨달음에 이른다.
이 시는 고통과 집착을 넘어 삶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태도를 보여주며, 독자에게 인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한강 특유의 간결한 표현 속에 담긴 철학적 깊이는 독자의 마음을 조용히 울린다.
ㅡ 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