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Oct 15.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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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한 조각
청람 김왕식
낡은 나무 탁자 위에 놓인 사각의 잔.
그 속에는 어제와 오늘이 뒤섞여 있다. 솔막주점에서는 시간마저 흐릿해지고, 잊고 싶던 일들이 불쑥 떠오른다. 손에 쥔 잔을 비우며, 사람들은 각자 가슴속에 묵혀둔 사연을 조심스레 꺼내놓는다.
주점 문을 열고 들어오는 발소리와 함께 비틀거리는 걸음이 들린다. 바람에 실려 들어온 먼지와 낯선 이의 얼굴. 그 얼굴에는 어디선가 쓸쓸함이 배어 있다. 솔막주점은 단순히 술을 파는 곳이 아니다. 이곳은 상처 입은 영혼이 잠시 쉬어갈 수 있는 피난처다.
술병이 바쁘게 흔들리는 사이, 담배 연기가 천천히 공기 위를 떠다닌다. 탁한 공기 속에서도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본다. 눈빛은 단순한 시선이 아니라, 묵묵히 서로의 존재를 위로하려는 작은 몸짓이다. 주인이 조용히 웃으며 말한다.
"다 지나가게 되어 있어요."
그 말은 언제나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처럼 들린다.
이곳에서는 술이 사람을 녹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온기가 술을 채운다. 잔을 들이켤 때마다 단순한 알코올 이상의 무언가가 우리를 부드럽게 감싸는 기분이 든다. 솔막주점의 주인은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외로운 길손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작은 위로와 쉼을 내어주며.
문 밖에서는 빗소리가 가늘게 울린다. 그 소리는 바쁜 도시의 소음과는 다르다. 사람들은 이 비가 그치면 다시 길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다들 여기서 쉬어간다. 술잔 너머로 스며드는 온기, 그 속에 잠시라도 머물며 숨을 돌린다.
솔막주점의 밤은 길다. 그러니 누구든 이곳을 지나는 동안은 괜찮다. 삶도 결국은 이 주점과 같지 않을까. 우리는 잠시 머물다 다시 떠나야 하는 노정 속에 있다. 그 짧은 순간이 주는 위로와 소소한 온기 덕분에, 우리는 다음 걸음을 뗄 수 있다.
삶이 고달플 때, 솔막주점 같은 마음의 쉼터가 필요하다. 그곳에서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며 알게 된다.
힘든 날도, 슬픈 기억도 결국 다 지나가리라는 것을.
솔막주점은 그렇게 오늘도 소리 없이 우리의 삶 속에 머물러 있다.